시민단체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가 기부금 사용내역을 해명하는 과정에서 엉뚱한 말을 했다. 엊그제 기자회견에서 “세상 어느 NGO(비정부기구)가 활동내역을 낱낱이 공개하느냐, 기업들에는 (회계 투명성을) 왜 요구하지 않는 건지 너무 가혹하다”는 말을 했는데, 그냥 넘길 수 없는 얘기다.
먼저 두 번째 주장, “기업들에는 회계투명성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말부터 짚어보자. 기업들은 민법 상법 공정거래법 등 각종 법률에 의해 투명성을 감시·감독받고 있다. 주식회사는 정기주주총회 등을 통해 주주들에게 회계 내역을 샅샅이 보고하고 승인받는다. “기업들에는…”을 운운한 것은 명백한 가짜뉴스다. 기업들이 회계내역을 국민에게 공개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은 얘기였더라도 부적절하다. 국민 기부로 운영되지 않는 기업들이 회계보고서를 국민에게 보고해야 한다는 건 억지다. 아무리 다급해도 그런 식으로 기업을 걸고넘어져선 안 된다.
첫 번째 주장 역시 오류일뿐더러 잘못의 정도에서 훨씬 더 심각하다. “세상 어느 NGO가 활동내역을 낱낱이 공개하느냐”고 했는데, 그런 단체가 많다. 아니, 법에 의해서 외부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자산 100억원 이상 공익법인은 회계내역에 대해 외부감사를 받게 돼 있다. 정의기억연대는 자산이 법 기준에 미치지 않아 외부감사 대상에서 벗어났을 뿐이지, “어떤 단체도 내역을 공개하지 않는다”고 우겨선 안 됐다.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단체라면 법령을 따지기 이전에 모은 돈을 어떻게 쓰고 있는지 최대한 상세하고 성실하게 공개하는 게 도리일 것이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회계내역 공개 논란 못지않게 주목을 모은 발언이 있다. “아무도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때 용감하고 헌신적인 몇몇 연구가들이 이 운동을 만들어왔다. 당시 여러분은 뭐하고 있었는가. 책 한 권은 읽었을까”라고 이나영 이사장이 기자들을 다그친 대목이다. 그 말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말 속에 진하게 배어 있는 ‘정의(正義) 독점’의 인식과 행태가 걱정스럽다. ‘용감’ ‘헌신’의 진정성을 인정받더라도, 그것을 불투명한 회계의 면죄부로 삼아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이사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위안부 문제 해결에 번번이 걸림돌이 됐던 방해 세력과 같이 동조해 이 문제를 폄훼하고 심지어 활동가를 분열시키고 있다. 상처를 입힌 여러분이 반성하길 바란다”며 ‘기부금 지출 내역’을 궁금해했을 뿐인 언론을 사납게 공격했다.
일개 시민단체 인사가 곤혹스러운 상황에서 한 말을 길게 물고 늘어질 생각은 없다. 걱정스러운 건 권위주의 시절 태동한 운동단체들이 ‘정의’라는 명분을 독점하는 데서 생기는 문제가 점점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외롭게 투쟁할 때 당신들은 무엇을 했는가”라는 일갈이 무소불위의 ‘도덕권력’으로 승화돼서는 곤란하다.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다. ‘조국 사태’를 비롯해 진보 진영 내 불법·탈법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숭고한 운동을 해 온 우리에게 감히…”를 되뇌는 ‘집단 독선’이 횡행한다.
시민단체들이 사회를 계몽하고 권력을 견제하는 본연의 역할 대신 이념과 진영의 덫에 빠져 거대한 이익집단, 권력집단이 된 현실을 진지하게 돌아볼 때가 됐다. 국내 인권문제는 시시콜콜 파고들면서 북한에서 자행되는 온갖 반인륜적 압제에 침묵하는 인권단체, 중국발(發) 미세먼지 논란에 소극적인 환경단체, 현 정부 내 인사들의 파렴치한 성범죄에 입을 닫는 여성단체는 “시민단체는 왜 존재하는가”를 묻게 한다.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이인영 전 원내대표는 지난달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총선에서 승리해 정권 교체를 넘어 사회적 패권 교체까지 완전히 이룩하겠다”며 ‘사회적 권력판도 개편’을 새 정치 아젠다로 예고했다. 기업·언론·종교·학계 등을 겨냥한 발언이었지만, 우리 사회의 건강을 지키는 소금으로서의 맛을 잃은 채 수렁에 빠진 시민단체들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일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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