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언어가 어렵다는 지적은 어제오늘 얘기가 아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수준의 말이면 독자들이 어렵다고 느끼는 것일까? 지난 2월 20일 국립국어원이 발표한 조사 결과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조사 대상 공공용어 140개 중에서 일반 국민이 ‘잘 모르겠다’고 응답한 용어가 97개(69%)에 달했다.
신문에서 자주 쓰는 외래어…국민은 어려워해‘산은, 공적 개발 원조, 예타, 일몰제, 라운드 테이블, 싱크탱크, 핀테크, 엠바고, 통화 스와프, 테스트베드, 밸류체인, 컨센서스, 규제 샌드박스, MOU, MICE산업….’ 신문 지상에 수시로 등장하는 외래어 및 한자어, 약어들에 “어렵다”는 응답이 줄줄이 쏟아졌다.
외래어·한자어 다듬기는 광복 이후 지속적으로 해오고 있는 작업이다. 하지만 현실 언어와의 괴리는 여전하다. 그것은 ‘우리말 인식’ 수준이 아직 성숙한 단계에 이르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한편으론 어떤 말이 나와서 퍼지고 자리 잡는 과정이 인위적으로, 특히 하향식으로 이뤄지기 어렵다는 점도 새삼 일깨워준다.
다듬은말이 언중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형태와 의미 면에서 그 자체로 ‘경쟁력’을 갖춰야 한다. 우리말 지키기나 살리기 식의 ‘명분론’ 또는 ‘당위론’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그러면 그 ‘경쟁력’의 요체는 무엇일까? 10여 년 전 남기심 전 국립국어원장이 한 인터뷰에서 지적한 데서 시사점을 찾을 수 있다. “요즘 ‘(병)따개’라고 쓰는 말을 예전엔 ‘오프너’라고 했습니다. 애초 정부에서 순화 작업을 하면서 제시한 말은 ‘마개뽑이’였는데, 그리 호응받지 못했어요. 대신 누군가가 쓰기 시작한 따개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은 것이지요.” 순화작업이 성과도 컸지만 때론 언어 현실과 동떨어진 경향이 있었다는 지적이다.
짧고 익숙한 우리말 대체어 찾는 데 힘써야‘동아리(서클), 나들목(인터체인지), 새내기(신입생), 댓글(리플), 미끼상품(로스리더), 둔치(고수부지), 갓길(노견), 덮밥(돈부리), 틈새시장(니치마켓)….’ 이들은 많지 않은 성공적 순화어로 꼽을 만한 대표적인 말이다.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형태적으로 짧고, 의미적으로 딱 떨어진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자연스러워 입에 착 감겨야 한다. 모국어 화자라면 그것을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2017년 한글날을 기념해 열린 국어학 학술대회(주제 ‘바람직한 국어순화 방향’)에서 나온 얘기도 참고할 만하다.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고유어가 오히려 외래어보다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국어 순화를 위해 ‘브런치’를 ‘어울참’으로, ‘퀵서비스’를 ‘늘찬배달’로 쓰자고 국립국어원이 제안했지만 이해하기 어려워 잘 쓰지 않는 말이 된 것이 그 예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말 다듬기 작업이 여전히 그동안 ‘명분론’ ‘당위론’에 매달려 있지 않았는지 돌아볼 일이다. 가령 ‘셧다운’은 이번 ‘코로나19 사태’에서 수시로 등장한 말이다. 국립국어원에서 이 말을 ‘가동정지’로 다듬었다. 실제로는 문맥에 따라 ‘일시적 영업중단/업무정지/가동중지/직장폐쇄’ 등 다양하게 번역돼 쓰인다. 대체어가 단일어로 정립되지 못한다는 것은 ‘언어 경쟁력’ 면에서 취약점이다. 좀 더 범용성 있는 말을 찾든지, 아니면 우리말 체계 안에 수용할지를 고민해야 한다.
‘외래어 대 다듬은말.’ 이들은 ‘언어의 시장’에서 서로 경쟁하는 관계다. 다소 어색하지만 쉽게 다듬은 우리말을 쓸지, 어렵지만 의미를 정확히 드러내는 외래어를 받아들일지, 최종 선택은 언중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