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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빛 기둥의 고아한 울림…"한국적 현대성 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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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그림은 잔소리를 싹 뺀 외마디 소리를 그린다. 화폭 양쪽에 굵은 막대기처럼 죽 내려 긋는다. (중략) 물감과 넓직한 붓 그리고 기름, 면포나 마포만이 내 작품의 재료다. 물감도 엄버(다색)와 울트라마린(남색) 두 색만을 쓴다.”

한국 단색화의 흐름을 선도한 윤형근 화백(1928~2007·사진)이 생전 노트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다색은 갈색, 남색은 청색이다. 작가는 “두 색을 깡통에 적당히 넣고 기름을 풀어서 조각천에 빛깔을 내보고는 큰 붓에 흠뻑 적셔 화포에 내려긋는다”고 했다.

하늘의 색인 청색과 땅의 색인 갈색을 섞어 면포나 마포에 내려그으면 문 형태가 나온다고 해서 윤 화백은 이를 ‘천지문(天地門)’이라고 명명했다. 색과 색의 여백이 또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문인 셈이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윤 화백 작품은 형태와 색채가 더욱 간결해졌고 규모는 커졌다.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윤형근 1989-1999’전은 윤 화백의 후기 작업을 선보이는 자리다.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 이후 2년 만의 국내 전시회다. 작가가 60대에 접어든 이후 선보인 대작 중심의 원숙한 작품세계를 조명한다. 수묵화 같은 번짐 기법과 두 기둥 형상이 특징을 이루는 초기 작업에 비해 더욱 구조적이면서도 대담한 형태로 진화한 1980년 말부터 1990년대 말까지 제작된 대작 위주의 회화 및 한지 작업 등 20여 점이 걸렸다.

윤 화백이 처음부터 먹빛 톤의 그림을 그린 건 아니었다. 1966년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제목미상’은 푸른색이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화면에 다양한 색채의 점들이 보석처럼 빛나는 작품이다. 1972년 작 ‘청색’은 시원스러운 청색의 선들이 화면을 지배해 수채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장인인 김환기 화백의 영향이 그대로 묻어나는 시기였다.

하지만 1973년 반공법 위반으로 억울한 옥고를 치른 뒤 그의 작품에선 밝은색이 사라졌다. 서울 숙명여고 미술교사였던 그는 당시 권부 실세였던 중앙정보부장의 도움으로 학생이 부정입학한 사건을 따지다 반공법 위반으로 몰려 옥고를 치르고 학교에서도 해임됐다. 청년기부터 불의한 권력의 핍박으로 죽음의 위기까지 겪었던 그였다.

극도의 분노와 울분을 삭여서 나온 것이 검고 어두운 ‘청다색’이었다. 초기 작품에서 세로로 길게 그었던 줄은 굵은 막대기 모양으로 커졌다. 리넨, 캔버스, 한지에 자연스럽게 스미고 번진 오묘한 검은색 기둥은 작가 특유의 명상적 작품세계를 구축했다.

이번 전시에는 윤 화백과 인연이 있는 두 거장의 작품도 한 점씩 걸려 있다. 추사 김정희와 미니멀 아트의 세계적 대가였던 도널드 저드(1928~1994)다. 일체의 작위와 기교를 배제한 그의 작업은 서화를 고매한 인격의 자연스러운 발현으로 여겼던 옛 선비정신과 맞닿아 있다. 윤 화백은 자기 그림 뿌리를 추사의 쓰기에 두고 있다며 작업실에 추사 글씨를 걸어두고 그 ‘졸박청고(拙樸淸高: 서투른 듯 맑고 고아함)’함을 따르고자 했다. 전시장에 걸린 추사 글씨 ‘木之必花 花之必實(목지필화 화지필실)’은 간결함 속에 고매함을 담았던 그들의 미학을 엿보게 한다.

저드는 윤 화백의 후기 작업에 더욱 힘을 불어넣어준 지기(知己)였다. 1991년 저드를 만난 이후 윤 화백 작품은 더욱 확신에 찬 조형언어로 보다 단순하게 전개됐다. 먹빛은 더욱 짙어졌고 서구의 미니멀리즘을 포괄함으로써 깊이와 독창성을 더했다.

전시 출품작들은 작가 사후에 처음 선보이는 것들이다.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는 “1989~1999년은 윤 화백이 단순함과 질박함의 미학에 대한 확신으로 한국적인 추상회화의 모더니티를 꽃피운 시기”라며 “원숙한 미학 세계를 바탕으로 동서양의 구분을 넘나들며 진정한 한국적 현대성을 화폭에 구현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6월 20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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