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일이다. 인감증명이 필요해서 행정복지센터에 갔다. 절차에 따라 오른쪽 엄지 지문을 채취해야 한다고 해서 기계 위에 오른쪽 엄지손가락을 갖다 대었다. 한참을 대고 있는데 지문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
당황스러웠다. 지문이 나오지 않는다고? 예전 미국 여행길의 공항 입국 심사 때에도 지문이 잘 나오지 않아 여러 차례 지문을 채취한 일이 있었지만, 이렇게 깡그리 나오지 않는다는 말은 처음이었다.
엄지의 지문 채취가 어렵게 되자 검지, 중지를 기계에 댔다. 그러나 역시 지문이 나오지 않았다. 이럴 수가! 나는 잠시 내 손바닥을 펼치고 손가락 끝을 살펴봤다. 흐린 눈으로도 손가락 끝에 지문이 보이지 않았다.
내 손가락 끝에서 지문이 사라졌구나. 행정복지센터 직원은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면서 주민등록번호를 외게 하고 또 딸아이 이름을 요구했다. 딸아이 이름까지 대고 나서야 겨우 인감증명이란 것을 발급받을 수 있었다.
왜 내 손가락 끝에서 지문이 지워진 걸까? 지문이 지워진 것은 손과 손가락을 많이 사용해서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많이 해온 일을 떠올려봤다. 책 읽기, 글씨 쓰기, 컴퓨터 자판 두드리기. 그렇지만 이런 것들 때문에 지문이 지워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근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은 문학관 정원에서의 꽃밭 일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모든 외부 일정이 취소되는 바람에 다른 해와 달리 유난히 많이 꽃밭 일을 했다. 그렇구나. 꽃밭에서 흙일을 하다 보니 손가락 끝이 닳아서 지문이 사라진 거구나. 하지만 이 정도로는 사라진 지문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오래전 어떤 도예가로부터 자신들은 흙을 많이 만져 아예 지문이 없노란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잘 아는 도예가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다시 확인해보기로 했다. 과연 그건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도예가는 새로운 사실 하나를 알려줬다. 꽃밭에서 흙을 많이 만져서도 그렇지만 책을 많이 만진 것도 지문을 닳게 한 원인이 된다는 말이었다.
왜일까? 도예가의 말에 의하면 책을 만드는 종이에도 나무에서 생산된 펄프와 함께 일정량의 흙이 들어간다고 한다. 그것도 도자기를 만드는 고령토. 이것은 까마득하게 모르던 정보다. 사람은 이렇게 일생을 살면서 모르고 사는 일들이 많다.
전화를 마치고 나는 다시금 손바닥을 들여다보고 두 손을 비벼 보았다. 손바닥 느낌이 더욱 밋밋하고 허전한 느낌이다. 그래도 어쩌랴. 이것이 내가 만든 나의 손바닥이고 손가락인데. 나는 앞으로도 오래 지문이 사라진 손으로 흙을 만지기도 하고 책을 펼치기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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