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이사를 내쫓으려면 100억원 주셔야 합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으로 국내외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있는 와중에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방어하기 위해 황금낙하산을 도입하는 기업들이 줄 잇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올 들어 주가가 급락하면서 자칫 잘못하단 경영권을 뺏길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과거엔 대주주 지분율이 낮은 코스닥 상장사들이 선호했지만 최근엔 대주주 지분율이 높아도 선제적으로 도입하려는 모습이다. 다만 황금낙하산이 부실 경영진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를 부추길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7일 증권업계에 따르면 국내 반도체장비 업체 에프에스티는 지난달 정기 주주총회에서 정관을 변경해 적대적 M&A 따른 퇴직보상금 지급 규정을 신설했다. 이른바 황금낙하산이다. 황금낙하산은 적대적 M&A로 경영진이 해임될 경우 통상적인 퇴직금 이외에 거액의 보상금을 주도록 정관에 못박는 제도다. 적대적 M&A를 추진하는 측의 재무부담을 눈덩이처럼 불려 사전에 적대적 M&A 시도를 막으려는 취지다. 일종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안전 장치다.
에프에스티는 정관에 "대표이사나 이사가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하고 있는데 경영권 위협세력에 의해 해임되는 경우 퇴직금 이외에 퇴직보상액으로 대표이사에게 각 50억원 이상을, 등기이사에게 각 30억원 이상을 지급한다"는 내용을 적시했다.
대화제약 역시 지난달 "퇴직금 이외에 퇴직 보상액으로 대표이사에게 각 100억원을 퇴직후 7일 이내에 지급한다"는 내용을 정관에 추가했다. 남영비비안 역시 "적대적 M&A로 임기 만료 전에 이사가 해임되는 경우 퇴직금 외에 퇴직보상액으로 대표이사의 경우 50억원 이상, 이사의 경우 30억원 이상의 퇴직위로금을 별도로 지급한다"고 정관에 못을 박았다.
황금낙하산은 코스닥에 상장된 중소기업들이 주로 도입한다.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에 비해 대주주나 기관투자가의 지분율이 낮아 적대적 M&A에 취약한 구조라서다. 코스닥에 상장된 중소기업들은 자기자본 규모가 작은 데다 절대적인 주가 자체가 낮아 경영권 장악에 필요한 지분율을 확보하는 게 상대적으로 수월하기도 하다.
하지만 최근엔 대주주 지분율이 높은 중소기업들도 황금낙하산을 찾고 있다. 코로나19 여파로 연일 주가가 급락하고 있어 적대적 M&A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아진 탓이다. 여기에 지난해까지 전환사채(CB)나 교환사채(EB) 발행으로 자금을 모았던 중소기업들이 많아 투자자들이 이들 사채의 권리를 행사하면서 신주가 발행되면 경영권을 위협할 수도 있기 때문에 미리 방어벽을 치려는 것이다.
실제 에프에스티의 최대주주 측 지분율은 30%에 달한다. 지분율만 놓고 보면 사실상 적대적 M&A 위험이 그리 크지 않다. 업계에선 미리 황금낙하산을 도입해 혹시 발생할 수도 있는 적대적 M&A 가능성을 원천 차단하려는 것으로 보고 있다.
투자은행(IB) 관계자는 "앞으로 기업 가치가 높아질 가능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며 "아무래도 황금낙하산이 도입된 기업이 경영권을 방어하기에 수월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시장 일각에서 이같은 황금낙하산이 기업들의 원활한 구조조정을 방해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내놓는다. 정상적인 경영이 이뤄지고 실적이 좋은 기업이 경영권 안정을 추구하는 건 바람직하지만 부실기업들이 악용하는 사례가 많다는 판단에서다.
업계 안팎에선 코로나19 이후 산업 재편이 가속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부실기업에 대한 옥석 가리기가 시작될 수 있다는 얘기다. 부실기업의 경우 경영진 교체 등을 통해 회생 기회를 찾아야 하는데, 황금낙하산이 전봇대처럼 버티고 있으면 쉽지 않다는 논리다.
증권사 관계자는 "황금낙하산으로 인해 기업을 부실화시킨 경영진에 대한 책임을 묻기 어려워지고, 오히려 경영진들이 막대한 자금을 챙기는 등 개인의 실속만 챙기기도 한다"고 말했다.
실제 국내에서 가장 먼저 황금낙하산을 도입했던 옵셔널벤처스다 대표적인 악용 사례다. 옵셔널벤처스는 2001년 대표이사가 타의로 물러날 경우 50억원의 퇴직위로금을 지급한다는 정관을 신설했다. 옵셔널벤처스 대표는 황금낙하산을 악용해 합법적으로 자금을 빼내갔고, 이후 영업정지와 감사의견 거절로 코스닥 시장에서 퇴출됐다.
기업지배구조원 관계자는 "황금낙하산은 부실 경영을 한 임원에게조차 과도한 보상금을 지급해 기업가치와 주주권익을 훼손할 수 있다"며 "성장 기업의 안정적인 경영을 지원하기 위해 도입됐지만 경영진이 잇속을 챙기거나 자리를 지키는 수단으로 악용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부실기업과 혁신·창의기업에 대한 경영권 보호 조치를 달리해야 한다는 의미다.
김은정 기자 kej@hankyung.com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