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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바이러스가 나타났다. 아시아에서 첫 환자가 나온 뒤 미국과 일본, 영국 등 세계에서 감염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박쥐에서 유래된 이 바이러스에 사람이 감염되면 기침 등 호흡기 증상을 겪고 열이 38도를 넘는다. 대면 접촉은 물론 버스 손잡이 등 간접 접촉으로도 감염될 수 있다. 치사율은 높다. 하지만 치료제는 없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떠올렸는가. 놀랍도록 비슷하지만 코로나19가 아니다. 이 바이러스는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2011년작 ‘컨테이젼’에 등장하는 ‘MEV-1’이다. 9년 전 개봉한 이 영화가 요즘 ‘코로나19 예언작’으로 불리며 다시 주목받는 이유다. ‘컨테이젼’은 신종 바이러스의 세계적 대유행(팬데믹) 상황을 다룬 영화다. 홍콩 출장을 갔다가 최초 감염자가 된 베스 엠호프(귀네스 팰트로 분)는 감염된 지 4일 만에 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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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젼’의 MEV-1 바이러스는 코로나19보다 훨씬 치명적이다. MEV-1은 최초 감염자가 발생한 지 133일 만에 2600만 명 이상을 죽음으로 몰고 간다. 치사율은 25%다. 네 명 중 한 명이 사망한다. 미국 존스홉킨스대에 따르면 3일 오전 기준 세계 코로나19 사망자는 5만2983명이다. 치사율은 국가별로 차이가 나지만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전 세계의 코로나19 치사율은 4.7%로 추정된다. 이탈리아 등 치사율이 높은 곳은 10%에 육박한다. 영화 ‘컨테이젼’보다는 낮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미지의 감염병을 맞닥뜨린 인간의 공포와 이로 인한 사회의 혼란은 코로나19가 확산된 지금의 현실과 매우 비슷하다. 중국 정부가 코로나19의 진원지로 추정되는 도시 우한을 봉쇄한 것처럼 ‘컨테이젼’에서는 미국 정부가 시카고 등 주요 도시를 봉쇄한다. 탈출이 불가능한 도시에서 사회 질서는 무너진다. 이 과정에서 ‘정보 불균형’ 문제도 생긴다. 질병통제예방센터 소속 에리스 치버 박사(로런스 피시번 분)의 부인 오브리(사나 라단 분)는 도시 봉쇄 계획을 먼저 듣고 건전지와 통조림 등 생필품 사재기에 나선다. 사재기는 급속도로 확산돼 마트에서 물건이 자취를 감추고, 군이 배급하는 전투식량을 두고 몸싸움이 벌어진다.
재난 영화의 단골 소재인 사재기는 미래에 재화의 가격이 오를 것으로 예상될 때 미리 사놓는 현상이다. 사람들이 사재기하는 이유를 경제학에서는 ‘합리적 기대이론’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이론으로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로버트 루카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는 경제주체들이 사용 가능한 모든 정보를 이용해 경제 상황을 합리적으로 예측한다고 봤다. 이때의 정보에는 과거의 경험과 현재 상황 외에 미래에 대한 기대도 포함된다. 사재기의 경우 사람들이 재화의 수요가 크게 늘거나 공급이 감소할 것이라는 정보가 있을 때 곧 가격이 오를 것이라고 예측해 미리 물건을 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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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는 유럽과 미국에서 사재기는 더 이상 영화 속 일이 아니다. 중국에서 제지 원료가 동났다는 소문이 퍼지며 휴지를 사기 위해 마트마다 수십 명씩 줄을 서는 ‘휴지 대란’이 벌어졌다. 식료품이 다 팔려 텅 빈 마트에서 고개를 떨군 노인의 사진이 인터넷에 퍼지기도 했다.
개인에게 이득, 사회에 손실인 ‘구성의 오류’
현실에서 사재기는 비난받을 때가 많다. 하지만 사재기를 비합리적인 소비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개인으로서는 한 제품의 가격이 오를 것으로 예상되면 미리 재화를 사두는 것이 합리적인 결정이기 때문이다. 오브리처럼 신종 바이러스로 곧 도시가 봉쇄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면, 미래에는 비싼 값을 치러도 생필품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오브리에게 사재기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인 것이다.
그러나 사재기는 경제학자 케인스가 주장하는 ‘구성의 모순’의 대표적 사례이기도 하다. 구성의 오류는 개인에게 합리적인 선택이 사회 전체적으로는 합리적이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는 현상을 뜻한다. 케인스는 ‘절약의 역설’로 구성의 모순을 설명한다. 개인이 저축을 많이 하면 재산이 늘어난다. 그러나 사회 구성원이 모두 저축만 하면 국가 경제가 침체된다. 소비가 줄어 물건이 팔리지 않고, 재고가 쌓인 기업이 생산을 줄이면 결국 기업에서 일하는 개인의 소득 감소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컨테이젼’에서는 구성의 모순이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사재기의 영향으로 생필품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선진국이라는 미국에서조차 복면을 쓰지 않은 강도들이 마트와 가정집에 침입한다. 그 과정에서 살인과 방화가 벌어진다. 베스의 남편 토머스 엠호프(맷 데이먼 분)도 음식을 구하기 위해 이웃이 살던 집을 몰래 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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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이들의 연대에서 피어나는 희망
영화 초반부터 과학자와 의료진, 정부 관계자들은 백신을 갈망했다. 영화가 끝날 무렵에야 개발된 백신이 시민들에게 공급되고 사회의 혼란은 차츰 수그러든다. 토머스는 고등학생 딸의 남자친구가 백신을 맞은 뒤 그를 집으로 초대해 조촐한 졸업 파티를 열어준다.
그러나 백신이 이 영화에 나오는 유일한 희망은 아니다. 초유의 재난 상황에서도 자신에게 ‘합리적인 선택’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정부기관의 과학자는 백신을 빨리 개발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자신의 몸에 임상시험을 했다. 한 민간 연구자는 사태 초기에 바이러스를 배양한 뒤 대형 제약사의 제의를 뿌리치고 정부에 무료로 기증했다. 치버 박사는 자신 몫으로 먼저 받은 백신을 센터 청소부의 아들에게 투여했다.
감염병이 창궐해 수많은 이가 죽어나가고 국가가 희미해진 극한의 상황. 이를 버텨내고 결국 극복하는 힘은 사재기 같은 개인의 이기적인 선택이 아니라 이타심과 희생이라는 점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우리에게도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위기에 빠진 대구에 도움의 손길을 보내고, 어렵게 구한 마스크를 택배 기사와 저소득층을 위해 선뜻 내놓은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노유정 기자 yjro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