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자를 포함해 여성들의 성착취 영상을 제작하고 텔레그램을 통해 이를 유포한 혐의를 받고 있는 ‘박사’ 조주빈과 그 일당을 엄벌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 법조계에선 이들에게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
그동안의 법원 판례를 따져볼 때 수사기관이 ‘박사방’의 지휘·통솔체계를 입증한다면 범죄단체조직죄 적용이 가능해 조씨뿐 아니라 ‘직원’으로 불린 적극 가담자들도 최대 무기징역이라는 중형에 처해질 수 있다.
◆검·경 모두 범죄단체조직죄 검토 나서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지난 24일 n번방에 대해 범죄단체조직죄 적용을 검토할 것을 검찰에 지시했다. 이에 검찰과 경찰도 법리 검토에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범죄단체조직죄를 규정한 형법 114조엔 “사형, 무기 또는 장기 4년 이상의 징역에 해당하는 범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 또는 집단을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 또는 그 구성원으로 활동한 사람은 그 목적한 죄에 정한 형으로 처벌한다”고 적시돼 있다.
조씨 일당이 ‘목적한 죄’ 가운데 가장 형량이 센 죄명은 아동청소년성보호법 위반(아동음란물 제작)이다. 무기징역 또는 5년 이상 유기징역이 법정형이다. 조씨 일당을 아동음란물 제작을 목적으로 한 범죄단체로 본다면, 실제 조씨처럼 직접적으로 제작 과정에 관여하지 않은 자들에게도 아동음란물을 제작한 것과 동일한 처벌을 내릴 수 있게 된다.
가령 조씨가 제작한 음란물을 영리 목적으로 판매·대여·배포만 한 자들과 미성년자를 조씨에게 알선하는 등 조씨의 범행을 돕기만 한 자들이 있다. 이들에게 아청법만을 적용한다면 각각 10년 이하 징역, 3년 이하 징역에 처해질 뿐이다.
하지만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해 직접 아동음란물 제작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을 조씨를 필두로 한 ‘범죄단체’의 구성원으로 본다면, 조씨 일당을 한데 묶어서 아동음란물 제작죄에 규정된 형량(최대 무기징역)을 내릴 수 있게 된다.
◆“단순 역할분담 넘어 통솔체계 필요” 수사기관의 이 같은 구상은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범죄단체조직죄는 당초 조직폭력배에게 주로 적용되던 조항이지만 최근 들어선 보이스피싱과 불법도박사이트 등 비교적 느슨하다고 인식되는 조직에도 폭넓게 인정되는 추세다.
보이스피싱 조직에 범죄단체조직죄를 처음 적용한 2017년 대법원 판례를 보면 △특정한 다수인 △구성원들 사이 일정한 범죄를 범한다는 공동목적 △시간적 계속성 △단체를 주도하거나 내부의 질서를 유도하는 최소한의 통솔체계 등을 범죄단체의 구성요건으로 한다.
법조계에선 n번방도 처음 세가지 요건은 충족한다고 본다. 다만 n번방에 최소한의 통솔체계가 있느냐는 데 대해선 이론이 있다.
법원은 다중의 단순한 역할분담 정도 만으론 범죄단체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4명이 어음사기를 위해 위장 사무실을 열고 각각 대표자, 감사, 대외업무 등을 맡기로 한 사례 △5명이 도박개장을 공모한 경우 △다수인이 소매치기를 목적으로 모여 실행행위를 분담하기로 한 경우 등에 대해선 대법원은 통솔체계를 인정할 수 없다고 봤다.
법조계 관계자는 “보이스피싱이 범죄단체로 인정된 이유가 총책-실장-팀장-상담원 등 지위 상하관계가 있었고, 근무시간과 실적에 따른 보수 등 구성원을 구속하는 내부규율도 있었기 때문”이라며 “n번방의 구조도 보이스피싱과 상당히 유사한 만큼 충분히 범죄단체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박사방’도 총책 조주빈이 피해자 모집·수금·유포·대화방 관리 등을 담당하는 이른바 ‘직원’들을 운영하는 등 체계적인 위계구조를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내부 강령과 조직도 수준의 명시적 체계가 보이지 않는 이상 통솔체계를 인정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조씨 일당을 범죄단체로 규정하더라도 구성원을 어디까지 볼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남아 있다. 보이스피싱 사건에서 콜센터 상담원처럼 범행에 깊숙이 관여하지 않은 자들은 범죄단체 조직원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번 사건에서도 n번방 단순 관전자들은 범죄단체 일원으로 보기 어렵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범죄집단 개념으로도 n번방 처벌 가능”일각에선 n번방을 범죄단체로 판단하기 여의치 않을 경우 ‘범죄집단’으로 의율하는 방법을 통해서도 관련자들을 엄벌할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승재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형법 114조 조문 중 ‘단체 또는 집단’이란 표현에 주목해야 한다”며 “개념적으로 따졌을 때 단체는 집단과 달리 다중의 위력 등이 인정되면 될 뿐 특별한 지휘체계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n번방을 범죄단체가 아닌 범죄집단으로 보더라도 형법 114조 효력을 그대로 살릴 수 있으며, 이럴 경우 소수 운영자급뿐 아니라 n번방 구성원 전원을 조주빈과 같은 형량으로 처벌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다만 형법 114조 개정이 있었던 2013년 이후 아직까지 범죄집단 개념을 적용해 기소가 이뤄진 사례는 현재까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중앙지방검찰청 관계자는 26일 “법리적용을 어떻게 할지에 앞서 지금은 사실관계를 따져보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인혁 기자 twopeopl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