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선 현대백화점그룹 회장(사진)은 지난 11일 경영전략회의를 주재했다. 한 달에 한 번 계열사 대표와 주요 임원들이 모이는 자리.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실적이 빠르게 악화되고 있다”는 보고가 이어졌다. 주력 계열사인 현대백화점 피해가 컸다. 3월 들어 매출이 전년 동월 대비 30% 이상 줄었다. “적자를 기록할 수 있다”는 보고도 있었다.
상황을 모두 들은 정 회장은 뜻밖의 지시를 했다. “가장 힘들어할 협력사를 위한 실질적 대책을 마련하라.” 자금 사정이 좋지 않지만 ‘곳간’에서 돈을 꺼내 협력사에 주란 지시였다. 정 회장은 “우리 같은 대기업도 이렇게 힘든데 중소 협력사는 오죽하겠냐”고 했다. ‘실질적’이란 말에 무게가 실렸다. 생색만 내는 방안은 내지 말란 얘기였다.
코로나19 극복 지원금 조성
정 회장 지시에 따라 현대백화점그룹은 15일 지원책을 내놨다. 협력사 직원들에게 총 75억원의 현금을 나눠주기로 했다. ‘코로나19 극복 지원금’이란 이름을 붙였다.
현대백화점은 백화점 내 각 브랜드 매장을 운영하는 매니저들에게 3~4월 월 100만원씩 지급하기로 했다. 국내 백화점이 브랜드 운영 매니저에게 현금을 주는 것은 처음이다.
브랜드 매니저는 백화점 매장 운영을 책임지는 관리자다. 이들은 자영업자나 다름없다. 물건을 팔아 백화점과 브랜드에 수수료를 떼주고 나머지를 자기 이익으로 남긴다. 판매 사원들 월급 주고 관리비 내는 것이 이들 매니저 몫이다. 소속은 각 브랜드, 혹은 협력사로 돼 있지만 고정적인 월급 없이 일하는 사람이 다수다.
코로나19 탓에 백화점 매출이 감소하면서 이들은 생계를 위협받고 있다. 현대백화점이 월소득 100만원에 미치지 못하는 매니저 수를 파악했더니 1600여 명에 달했다. 가장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들을 찾아낸 셈이다. 현대백화점과 현대아울렛 총 21개 매장에서 일하는 중소 협력사 브랜드만 이 정도였다. 현대백화점은 당장 이들의 생계부터 챙기기로 했다. 월 100만원을 이달 중 지급한다. 상황이 심각한 매니저에게는 다음달에 또 100만원을 준다. 대상자는 3000여 명에 이를 전망이다.
현대백화점면세점도 현금 지원에 나선다. 무역센터점, 동대문점 두 곳에 입점한 200여 개 브랜드에 속한 판매사원이 대상이다. 지원액은 총 2억원이다. 현대백화점면세점은 2018년 영업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이익을 내본 적이 없다. 적자 회사지만 ‘고통 분담’에 동참하기로 했다.
가구 사업을 하는 현대리바트, 건축자재 사업을 하는 현대L&C도 프로그램을 마련했다. 가구를 구입하고 인테리어 시공을 하는 소비자가 급감해 판매사원과 설치기사 소득이 크게 줄었기 때문이다. 현대리바트는 3~4월 두 달간 3억원의 현금을 지급한다. 현대L&C는 대구·경북 지역 내 설치기사와 직원 100여 명에게 5000만원을 준다. 패션 계열사 한섬은 1300여 개 브랜드 매장 매니저에게 총 5억원을 지급한다. 대구·경북 지역 매장은 100만원, 그 외 지역 매장은 30만원씩이다.
금융 지원 방안도 추가로 내놔
현금 지원에 더해 금융 지원에도 나선다.
매월 말에 줬던 협력사들 납품 대금을 20일 앞당겨 매월 10일에 주기로 했다. 당장 돈이 급한 협력사가 많기 때문이다. 총 3800여 개사의 납품대금 약 3000억원이 선지급된다.
이미 조성한 약 1000억원 규모의 ‘동반성장펀드’도 활용한다. 중소 협력사들이 저금리로 쓸 수 있는 이 돈을 받으려면 기존에는 최소 3주의 심사 기간이 필요했다. 앞으론 심사 기간을 1주일로 앞당긴다.
현대백화점은 앞서 지난 2월에도 지원 방안을 내놨다. ‘상생협력 기금’ 500억원을 조성해 무이자로 빌려주고 있다. 업체별 지원액은 최대 1억원이다. 지금까지 150여 개 협력사가 이 돈을 받아갔다.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협력업체들과 합심해 어려움을 극복하겠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방식을 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말했다.
안재광 기자 ahn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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