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늘어트린 백발, 주름진 얼굴, 구부정한 허리까지. 서늘하다 못해 어딘가 기괴한 느낌까지 드는 모습으로 등장한 드라큘라 김준수는 다소 생경하다. 그러나 이 낯설고 스산한 분위기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덧 무대 위에는 긴 시간 한 여인만을 갈구해 온 드라큘라 백작, 그의 애처롭고 고독한 사랑 단 하나만이 남는다.
지난 11일 개막한 뮤지컬 '드라큘라'는 오랜 시간 동안 오직 한 여인만을 사랑한 드라큘라 백작의 이야기를 다룬 아일랜드 소설가 브램 스토커의 동명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김준수는 400년 동안 사랑하는 여자를 잊지 못하는 드라큘라 역을 맡아 무대에 오르고 있다.
'드라큘라'하면 단연 붉게 물들인 머리에 차갑지만 깊은 눈빛으로 바라보는 김준수가 떠오른다. 2014년 초연에 이어 2016년 재연까지 이미 두 차례나 드라큘라로 인상적인 연기와 폭발적인 가창력을 선보인 탓일 테다. 벌써 세 번째 오른 '드라큘라' 무대. 김준수가 풀어내는 드라큘라 백작은 여러 번 갈고 닦인 끝에 한층 유연해졌고, 더 날카롭고 세밀한 감정의 변주를 일으킬 수 있게 됐다.
처음 등장한 드라큘라의 자태를 보고 있노라면 과연 어떻게 이 기묘한 분위기의 백발 노인이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뱀파이어로 변모할지 가늠조차 어렵다. 김준수는 방심한 관객들의 빈틈을 제대로 찌른다. 드라큘라는 조나단의 약혼녀 미나를 보고 아내 엘리자벳사가 환생한 것이라 느끼고 그가 운명의 상대라 확신한다. 그리고는 이내 조나단의 피를 마셔 젊음을 얻는다. 김준수는 흡혈 후 신비로움을 자아내는 붉은 머리카락에 창백한 얼굴빛의 뱀파이어로 변신, 단숨에 젊음을 소화해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본격적으로 잔혹한 뱀파이어, 사랑을 간직한 남자 사이를 오가는 드라큘라의 모습이 김준수의 날렵한 듯 단단한 쇳소리와 만나 때로는 잔혹하게, 때로는 절절하게 표현된다. 영원한 삶을 노래하며 흡혈을 즐기는 어둡고 무서운 이미지는 아주 자연스럽게 사랑을 울부짖는 가슴 아픈 사연을 지닌 인간적 뱀파이어로 흘러간다. 김준수의 디테일한 연기, 감정을 극대화하는 호흡과 창법 등 노련함이 상반되는 이미지에 매끄러운 이음새를 만들었다.
백발의 노인 드라큘라가 피를 마시고 젊음을 얻기 위한 과정에는 그의 사랑이자 목표물인 미나가 있다. 미나 역은 조정은, 임혜영, 린지(임민지)가 소화한다. 올해는 드라큘라의 아내였던 엘리자벳사의 초상화를 추가로 등장하고, 그와 관련한 대사들을 변경해 드라큘라와 미나와의 인연을 한층 강화했다. 미나를 향한 사랑의 타당성이 보강되면서 김준수는 더 절절하고 매혹적인 연기로 극적인 호흡을 주고 받았다.
장비와 세트도 업그레이드했다. 객석과 무대의 거리를 더 가깝게하며 몰입도를 끌어올리는가 하면, 블랙 스크린으로 영상 효과도 극대화했다. 뿐만 아니라 소품의 디테일을 높이고, 스탠딩 세트를 플라잉 세트로 전환하는 등 공연장의 공간을 최대로 활용하면서 더욱 극적인 연출을 위한 노력을 쏟아 부었다.
프랭크 와일드혼이 풀어내는 서정적이면서도 드라마틱한 음악은 강력한 감정의 요동을 일으킨다. 지옥과도 같은 잔혹한 뱀파이어로서의 삶, 그 안에서 사랑하는 여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이별 없는 영원한 사랑'뿐인 드라큘라의 고백, 순수함, 애처로움이 각 넘버들과 어우러져 강약을 거듭한다. 특히 드라큘라와 미나가 서로 운명임을 깨닫고 부르는 '러빙 유 킵스 미 어라이브(Loving you keeps me alive)'는 비릿했던 핏빛을 어느새 묘한 매력의 장미로 승화시킨다.
한편 '드라큘라'는 오는 6월 7일까지 서울 송파구 샤롯데씨어터에서 이어진다.
김수영 한경닷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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