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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과장 & 이대리] '워라밸' 바람에 시들해진 승진 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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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로부터 임원은 ‘샐러리맨의 꽃’으로 불렸다. 수십 년의 직장생활 끝에 도달할 수 있는 영광스러운 자리여서다. 그러나 요즘 직장인에게 임원은 점점 ‘향기 없는 꽃’이 돼가고 있다. 지난달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직장인 108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임원이 되려고 준비 중’이라고 답한 사람은 전체의 34.7%에 그쳤다. 2017년 조사 때(41.1%)보다 6.4%포인트 낮아졌다. 회사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를 묻는 질문에도 ‘직급에 상관없이 정년까지 보장받는 안정적인 직장생활’이란 응답이 24.4%로 가장 많았다. 인생의 목표에서 ‘임원 승진’이 점점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김과장 이대리들의 얘기를 들어봤다.


성공보다 안정 선호해

“행복해 보이지 않아요.” 한 대기업에 다니는 박 매니저는 새벽에 나와 밤 늦게까지 야근하는 팀장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는 가늘고 긴 회사생활을 추구한다. 박 매니저는 “과거에는 승진이 곧 ‘성공한 인생’이었지만 요즘 세대는 그렇지 않다”며 “최근 아이가 생기면서 회사에서 인정받는 게 무조건 중요한 건 아니라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말했다.

성공보다 안정을 선호하는 가치관이 젊은 직장인 사이에 퍼지고 있다. 자동차부품 업체에 다니는 김 대리는 같은 팀의 박 부장과 친하다. 박 부장은 수 년 전 임원 경쟁에서 밀려 만년 부장으로 있다가 내년 정년퇴직할 예정이다. 박 부장보다 한참 연차가 낮은 후배가 팀장이다. 김 대리는 “몇몇 동료는 박 부장이 업무에 잘 참여하지 않는 ‘월급 루팡’이라고 불만스러워 하는데 내 생각은 좀 다르다”며 “후배가 자기 위에 있으니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그걸 버티며 회사에 있는 것도 대단해 보인다”고 했다.

열심히 일해도 결말이 좋지 않은 사례는 김과장 이대리의 직장생활에 중요한 타산지석이 되기도 한다. 서울 여의도의 한 증권사에 다니는 오 과장은 임원 승진을 일찌감치 포기했다. 오 과장은 “임원들의 평균 연령이 점점 낮아지면서 40대 중후반에 좌천되거나 한직으로 물러나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다”며 “지금 직장에 더 이상 다니기 힘들어지면 학교 선배가 운영하는 자산운용사로 옮겨볼까 하는 생각에 그 선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임원보다 정년 보장이 정신건강에 좋아”

실리적인 측면에서 임원 승진을 기피하는 경우도 있다. 지방에 있는 한 공기업에 다니는 김 부장의 직장생활 원칙은 ‘승진하지 않는 것’이다. 임원이 못 되면 60세 정년까지 4~5년 더 일할 수 있지만 임원으로 승진하면 회사 관례상 임기 2년을 마치고 퇴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임원에 오르면 연봉이 억대를 훌쩍 넘지만 그는 현재 연봉에도 만족한다. 김 부장은 “임원으로 승진해도 연봉 상승폭은 10% 남짓에 불과하다”며 “회사를 퇴직할 때까지 받을 수 있는 임금 총액을 따지면 임원이 되는 게 오히려 손해”라고 말했다.

식품회사에 다니는 나 과장은 상무보를 단 입사 동기가 전혀 부럽지 않다. 그는 ‘임원행 열차’를 못 탄 대신 임금피크제를 통해 정년을 보장받는 쪽을 택했다. 나 과장은 “임원이 되지 않으면 노조 소속으로 직원 신분을 보장받으니 마음 편하게 직장생활을 할 수 있다”며 “회사를 오래 다녀 자녀 학자금 지원을 받는 기간이 늘어나는 것도 장점”이라고 했다.

임원이 되면 떠맡아야 할 책임이 큰 것도 부담스럽다. 엔터테인먼트 회사에서 근무하는 강 대리는 “임원이 돼도 연봉은 크게 오르지 않는데 업무량과 책임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늘어난다”며 “실적 부진이나 사고친 부하 직원을 책임지느라 임기 2년을 다 채우지 못하는 임원이 적지 않다”고 했다. 그는 “월급받는 만큼만 일하면서 마음 편하게 살고 싶다”며 “금전적 측면뿐 아니라 정신건강 측면에서도 임원보다 정년을 채우는 게 훨씬 낫다”고 덧붙였다.

사내 분위기 망친다는 지적도

마냥 회사에서 버틸 수 없는 상황이라면 ‘안전지대’로 피신하기도 한다. 대형 회계법인에 다니던 최 회계사는 지난해 외국계 기업으로 이직했다. ‘워라밸’을 위해서였다. 그는 “회계법인을 나올 때 ‘그저 편안함을 위해 나간다’고 손가락질하는 선배도 있었다”며 “하지만 아등바등 사는 것보다 여유로워진 현재 생활에 더 만족한다”고 했다.

일각에서는 이런 안정지향적 분위기가 동료들의 의욕을 꺾는 등 사내 분위기를 망친다고 지적한다. 서울의 한 은행에 다니는 장 대리는 최근 동기들과 사이가 틀어졌다. 야근을 하더라도 맡은 일은 끝장을 보는 그에게 동기들이 “장 대리는 임원 달려고 저렇게 열심히 한다”고 비아냥거렸기 때문이다. 그는 이번 인사 때 지점 대신 본점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출세를 위해서라기보다는 편안한 하루를 보내는 데 골몰하는 동료들에게 더 이상 배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장 대리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되레 바보 취급을 당하는 게 정상이냐”고 토로했다.

회사에 갓 들어온 신입사원들도 ‘정년 제일주의’ 분위기에 일할 의욕이 떨어진다고 씁쓸해한다. 지방의 한 공기업에 다니는 조 사원은 “선배들이 ‘일도 많고 책임도 무거운 임원은 절대 되지 말아야 한다’며 ‘3급 직원이 최고’라는 말을 공공연히 한다”며 “몇 년간 열심히 준비해서 큰 꿈을 안고 입사했는데 이런 사내 분위기가 솔직히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임유 기자 free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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