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당 소득 1만달러를 넘으면 민주화 욕구가 분출한다는 통설은 틀린 것 같다. 인플레 탓인지 ‘1만달러 국가’에 더 강력한 철권 통치자들이 적지 않다. 사라진 줄 알았던 차르, 술탄, 황제 같은 전제군주 칭호가 21세기에도 자주 들린다.
차르(Tsar)는 카이사르에서 유래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이 로마 황제를 지칭하는 보통명사가 돼 러시아 차르, 신성로마제국 카이저(Kaiser) 등으로 변주된 것이다. 술탄(Sultan)은 아랍어로 ‘권력, 권위, 통치자’를 뜻한다. 차르든, 술탄이든 황제와 동급이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한 헌법 개정을 추진한다는 소식이다. 22년째 집권하며, 한국 대통령만 5명을 만났다. 그는 대통령 3연임을 금지한 헌법을 의식해 4번의 임기 중간에 ‘실세 총리’도 한번 지냈다. 2024년 임기 종료에 앞서 개헌으로 의회 권한을 대폭 강화해 실세 국회의장이나 총리로 권력을 유지할 것이란 관측이다.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도 그에 못지않다. 2003년 총리가 됐고, 2018년 개헌 뒤 대통령에 올라 18년째 집권 중이다. 별칭이 ‘터키의 푸틴’ ‘21세기 술탄’이다. 2016년 쿠데타로 위기를 맞았으나 2001년 3000달러이던 1인당 소득을 10년 만에 1만달러로 끌어올린 덕에 무사했다. 당시 터키에선 “최악의 민주주의가 최상의 쿠데타보다 낫다”는 말도 나왔다. 2023년은 세속주의 터키공화국 100주년인데, 에르도안은 거꾸로 율법주의와 오스만제국 부활을 꿈꾼다. 최근 경제난과 독재 반발이 변수다.
2013년 집권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도 임기철폐 개헌으로 사실상 종신 집권의 길을 열었다. ‘시황제’로 불리는 이유다. 이들 3인방은 강력한 국민 통제와 카리스마, 민족주의적 포퓰리즘 등으로 국민이 다른 지도자를 상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60대 후반(1952~1954년생)에 전성기를 누리는 공통점도 있다. 논란이 있지만 푸틴과 에르도안은 직접선거로 뽑혔다. 국민이 쫓아내지 않는 한 권력을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나라는 ‘제왕적 대통령’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3권 분립과 ‘견제와 균형’이 어딘가 고장난 탓이다. 진짜 ‘민주적 통제’가 필요한 것은 최고 권력이 아닐까. 21세기에 자꾸 민주주의를 생각하게 된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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