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수채화의 맥을 잇고 있는 정우범 화백(74)은 지난 40여 년 동안 자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왔다. 정 화백은 2002년부터 수채화에 아크릴을 혼용한 ‘판타지아’ 시리즈를 선보였다. 장미, 팬지, 양귀비, 피튜니아 등 형형색색 원색의 꽃들을 화면에 빼곡히 채워 많은 미술 애호가를 열광시켰다. 원색의 꽃들로 가득 채워진 단순한 구성이지만 빠른 붓놀림과 문지르기 기법으로 상생과 융합의 미학을 풀어냈다. 최근에는 삼각형과 사각형 등 기하학적 요소나 글자 형태로 꾸민 ‘문자 판타지아’에 매달리고 있다.
정 화백의 근작 ‘판타지아’를 비롯해 전명자 김재학 김명식 김정수 박일용 안광식 오상열 박현웅 김대섭 등 탄탄한 화력을 갖춘 작고·중견 화가 10여 명의 작품 3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가 마련됐다. 서울 청파로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가 선화랑과 공동으로 오는 30일까지 여는 신년 특별전 ‘2020 빛과 희망’이다.
1980년 이후 현대미술을 조명하기 위해 마련된 이번 전시에는 작가마다 창의적 도전을 시도했던 작품부터 2010년대 이후 최근 작품까지 소개된다. 출품작은 풍경화, 정물화, 사실주의 회화 등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프리즘을 다채롭게 보여준다. 2007년 12월 프랑스 국립미술협회전(SNBA)에서 대상을 받은 전명자 화백은 아래로 굽은 것 없이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노란색 해바라기를 화폭에 가득 올린 작품을 출품했다. 황금색으로 물든 해바라기에 결혼행진곡을 시각적으로 접목한 게 이채롭다. 진달래 작가로 잘 알려진 김정수 화백은 ‘축복’ 시리즈를 걸었다. 수많은 진달래 꽃잎을 마치 고봉밥처럼 형상화해 어머니의 헌신적 사랑을 녹여냈다는 게 작가의 설명이다. 분홍색의 꿈틀거림 속에 모성애 같은 잔잔한 율동이 느껴진다.
‘장미의 작가’ 김재학 화백도 정물화를 내놓았다. 회색 톤의 무채색 바탕 위에 배경을 생략한 채 장미와 꽃병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근작이다. 꽃과 화병은 사진처럼 세밀하게 표현하되 배경은 추상화처럼 단순화한 작가의 구성 방식이 유별나다. ‘색채의 마술사’ 김명식 화백은 미국 뉴욕 맨해튼 동쪽 이스트사이드의 다양한 이야기를 화폭에 응축한 작품을 보내왔다. ‘이스트사이드 스토리’ 연작은 1999년 뉴욕을 방문해 받은 신선한 충격으로부터 시작했다. 작품에는 화사한 봄을 연상시키는 색채의 향연이 펼쳐진다.
대구 화단의 구상회화 맥을 이어온 40대 작가 김대섭도 가세했다. 맑고 순수한 자연 속에 어린이, 토끼, 고양이 등 귀여운 이미지가 등장하는 ‘메모리’ 연작은 유년시절 기억을 시각화했다. 산뜻하고 싱그러운 녹음과 밝고 활기찬 동심의 세계가 캔버스 구석구석 파고든다. 핀란드산 자작나무를 직접 손으로 깎고 오려 붙인 다음 알록달록한 색을 칠해 동심의 세계를 표현한 박현웅의 부조형 작품, 한지를 한 장 한 장 쌓아올리듯 50여 차례 붓질을 통해 꽃과 항아리를 영롱하면서도 아득한 느낌으로 살려낸 안광식의 그림, 자연의 결정적 순간을 포착한 이영수의 그림, 따듯한 봄날에 활짝 핀 꽃망울을 차지게 묘사한 오상열의 작품에도 눈길이 간다.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