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準)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한 공직선거법 개정안이 상정되면서 지난 4월 말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지정된 지 7개월 만에 통과를 눈앞에 두게 됐다. 그러나 자유한국당이 선거법에 대한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에 들어감에 따라 본회의 표결까지는 다소 시일이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당, 선거법 상정에 필리버스터 ‘맞불’
패스트트랙 선거법 개정안이 전격 상정된 23일 밤 국회 본회의장은 시종일관 아수라장이었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이날 오후 8시 임시국회 회기 결정의 건과 내년도 정부 예산 부수법안을 포함한 33건의 안건을 본회의에 상정했다.
본회의가 개의되자 한국당은 필리버스터에 나섰다. 첫 번째 의결 안건인 ‘임시국회 회기 결정 안’부터 필리버스터를 하려 했으나 문 의장이 불허해 무산됐다. 문 의장은 “임시국회 회기에 대한 필리버스터는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임시국회 회기를 이달 25일까지로 하는 회기 결정 안(더불어민주당 제출)은 5분간 찬반 토론만 거친 뒤 바로 표결에 부쳐져 통과됐다. 그러자 한국당 의원 수십 명은 의장석 앞으로 달려가 “문희상 사퇴” “아들 공천” 등을 외치며 강력히 항의했다. 이주영 의원은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문희상 날강도”라는 고함도 터져나왔다.
이날 오후 9시40분께 문 의장이 민주당의 요청을 받아들여 본회의 27번째 안건이었던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앞당겨 상정하는 의사 일정 변경 동의의 건을 표결에 부치면서 ‘난장판 국회’는 순식간에 정점으로 치달았다.
선거법은 애초 33개 본회의 상정 안건 중 27번째로 표결에 부쳐질 예정이었다. 한국당은 선거법에 앞서 상정될 20여 개 예산 부수법안에 대해 각각 20~30건에 달하는 무더기 수정안을 제출해 표결 저지를 시도하려 했으나 문 의장이 돌연 의사 진행 순서를 바꾸면서 상정을 저지하지 못했다. 선거법이 상정된 직후 필리버스터 첫 주자로 나온 주호영 한국당 의원은 패스트트랙 법안 처리의 불법성을 강조하면서 “70년 넘게 쌓아온 민주주의를 여러분이 일거에 다 무너뜨리고 있다”며 “나라가 전리품인가”라고 비판했다. 민주당은 한국당이 이번 임시국회 회기 종료일인 25일까지 필리버스터를 이어갈 경우 선거법 표결을 새 임시국회 첫날인 26일 시도할 것으로 예상된다.
범여권, 석패율 도입 갈등 봉합
여야 ‘4+1 협의체’(민주당·바른미래당·정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는 이날 국회의원 의석수를 현행대로 지역구 253석, 비례대표 47석으로 유지하되 연동형 비례대표 의석수를 30석으로 제한하는 합의안을 가까스로 도출했다.
석패율제는 도입하지 않기로 했다. 석패율제는 지역구에서 아깝게 떨어진 2등 후보를 비례대표로 부활시키는 제도다. 정의당과 일부 지지층이 겹치는 민주당은 석패율제 도입 시 수도권 등 경합지의 표 분산을 우려해 반대해왔다.
민주당은 비례 의석수를 늘리지 않은 데다 석패율제까지 무산시키는 성과를 얻었다. 정의당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6석 이상의 의원 확대를 넘볼 수 있게 됐다. 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대안신당은 호남 의석수를 그대로 지켜냈다는 점에서 ‘선방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4+1 협의체가 전격 합의에 이른 것은 한국당이 비례한국당 창당을 시사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으로 의석수를 대폭 늘리기 어려운 한국당은 비례대표를 내지 않는 대신 비례한국당에서 비례대표 후보를 등록해 정당 표를 몰아서 받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한국당의 비례대표 의석은 늘어나는 반면 민주당과 정의당 의석은 줄어든다. 이 때문에 마음이 급해진 군소 야당들이 그동안 주장한 석패율제를 전격 포기하면서 합의 도출을 서두른 게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조미현/성상훈 기자 mwise@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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