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호 감독(56)은 1998년 데뷔작 ‘8월의 크리스마스’를 비롯해 ‘봄날은 간다’ ‘외출’ ‘행복’ 등을 내놓으며 ‘멜로 장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신파에 빠지기 쉬운 멜로물을 세련되고 감각적으로 연출해 명성을 얻었다. 2016년 ‘덕혜옹주’에 이은 그의 두 번째 사극 연출작 ‘천문’이 26일 개봉한다. 세종대왕이 장영실을 신하로 등용해 자격루(물시계)를 만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롯데컬처웍스 등이 총제작비 155억원을 투입했다.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허 감독을 만났다.
“조선의 두 천재가 신분차를 극복하고 백성을 위해 큰 업적을 남긴 이야기를 그렸죠. 서로를 믿고 존중하는 군주와 신하 사이에 흘렀던 따스한 마음을 담아내려고 했습니다.”
허 감독은 사료를 찾아보니 조선시대에 시계를 만드는 일이 실로 대단한 일이었다고 강조했다. “조선시대에 자격루라는 자동시계는 오늘날 핵무기 같은 신기술이었어요. 당시 아라비아와 중국만 갖고 있던 이 신기술을 장영실이 독자적으로 개발해낸 거죠. 그런데 시계는 중국 황제의 전유물이었어요. 중국인이 개인적으로 시계를 만들면 사형에 처했는데, 조선인이 만들었으니까 중국이 가만있지 않았을 겁니다.”
영화는 세종이 탔던 안여(임금의 수레)가 부서지는 바람에 이를 만든 장영실이 곤장 80대를 맞았다는 사서의 기록을 이런 역사적 배경과 관련지어 풀어낸다. 장영실은 곤장을 맞은 뒤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고, 훈민정음이 곧 반포됐다. 영화는 장영실과 명나라, 훈민정음 창제 간의 함수관계에 상상력을 발휘한다. 시계는 명나라와 조선의 갈등 요인이었고, 한글은 백성들에게 지식을 돌려주려는 세종과 지식을 독점하려는 사대부 간 대립 요인이었다. “세종은 자신이 아끼던 신하를 끝까지 곁에 두고 중용했죠. 엄격한 신분사회에서 세종은 천민 출신 장영실을 종3품 대호군까지 올려줬을 정도로 아꼈어요. 마지막에 장영실을 내친 데는 분명히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그는 연기파 배우 최민식과 한석규를 장영실과 세종 역으로 캐스팅했다. “두 배우는 동국대 선후배 사이로 드라마 ‘서울의 달’과 영화 ‘넘버3’ ‘쉬리’ 등에서 호흡을 맞췄죠. 둘만의 ‘케미’를 만들어낼 것으로 기대했어요. 한석규는 병든 상태에서 국사를 처리해야 했던 말년의 세종을, 최민식은 천진난만한 천재의 모습을 잘 그려냈습니다.”
허 감독이 이 작품을 연출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관객 559만 명을 모은 ‘덕혜옹주’의 성공이 자리 잡고 있다. “덕혜옹주는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의 슬픈 이야기로 감동을 줘서 성공한 듯싶습니다. 멜로처럼 남녀의 감정은 아니지만 사극은 사람 간 감정을 다루는 점에서 멜로와 공통점이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다룬다는 점에서 스케일은 멜로보다 큽니다.”
그가 멜로를 많이 연출한 이유는 무엇일까. “멜로는 희로애락 감정이 다 들어가 있고, 우리네 일상과 삶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앞으로도 멜로를 제작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요즘 극장가에는 멜로물이 예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 “드라마에서도 멜로를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일 겁니다. 사운드와 스크린이 큰 극장에서는 관객들이 다른 오락요소를 원합니다. 멜로를 스펙터클하게 하면 경쟁력이 있을 겁니다.”
유재혁 대중문화전문기자 yooj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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