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중심인 ‘집 이야기’…가족도 빼놓을 수 없어
|떠나지 못해 집을 닮고 만 父와 피붙이기에 그를 똑 닮은 딸
[김영재 기자] 요즘 은서(이유영)는 바쁘다. 원룸 계약 만료를 앞두고 점심시간마다 집을 소개 받고 있어서다. 하지만 마음에 썩 드는 집 찾기가 이렇게 어려워서야. 결국 은서는 잠시 본가에 머물기로 결심하고, 아버지 진철(강신일)과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다.
영화 ‘집 이야기(감독 박제범)’는 ‘집’을 주제로 하는 작품이다. 물론 이목(耳目)이 있다면 누구든 알아차릴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어쩌면 집 말고 ‘가족’을 눈여겨보는 일이 본작을 이해하는 데 더 좋은 길라잡이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 든다.
다시 말하지만 ‘집’을 향한 초점이 노골적이다. 18일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홍보사 측은 집을 모티브로 하는 오각형 책자를 배부했고, 감독은 “인생이 만남과 이별의 반복인 것처럼 집과 그 집을 채우고 비웠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 때문일까. ‘집 이야기’에는 문자 그대로 집이 원 없이 등장한다. 부동산 중개인의 “몇 번째 집이세요?”라는 물음은 출발선에 지나지 않는다. 언니 은주(황은후)에게 그가 사는 익산 집은 엄마 미자(서영화)의 제주도 집과 바꾸고픈 일상이다. 친구 경란(공민정)이 사는 반지하 집은 그에게 “영감”과 남자를 화수분처럼 베푸는 고마운 집이다. 잠시 머무는 곳에 불과한 레지던스, 누군가에게는 선망의 대상인 아파트, 게다가 편집 기자로 일하는 은서는 상사에게 “건축가가 집을 만들 때 그냥 막 만들지 않”는다며 꾸중을 듣는다.
특히 아파트는 진철이 가족에게 그의 마음을 걸어 잠그게 된 결정적 요인이다. 은서는 계속 같은 집만 고집하는 경란에게 “너 그러다 평생 반지하 산다”고 장난스럽게 말한다. 여기서 ‘반지하’는 그곳은 기피 대상이라는 내용의 부정을 내포한 단어다. 한편, 열쇠공 진철은 집주인이 출장비를 가지러 간 사이 그 집 거실을 애잔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그것도 현관 밖에서. 그에게 아파트는 지난 20년간 통한만을 안긴 ‘가질 수 없는 너’다.
가족 이야기도 한 축이다. 정서상 멀어진 두 부녀가 다시 가족으로 뭉치는 과정은 “아빠” 진철의 잔망스러운 보살핌 덕에 극 중후반까지 활력을 얻는데, 그 중심에 배우 강신일이 있다. 이번 영화로 드디어 기존의 “소리 지르고 욕하는” 역할로부터 탈피했다며 만족을 표시한 그는, 본작에서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우리가 기억하는 그 시절 아버지로 존재한다. 무뚝뚝하지만 어디서 상이라도 받아 오면 동네방네 자랑하는 데 여념이 없던 그 아버지 말이다. 비록 첫 등장에서는 목소리를 너무 내리깐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들 법하나, 연기 베테랑답게 자식에게 털끝만 한 피해도 끼치기 싫은 우리 시대 아버지를 실제처럼 노련히 표현해 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마음을 담고 싶었다”는 말 그대로다.
부녀 관계 역시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 대구가 볼 만하다. 은서의 반지하 농담에 경란은 그가 깨달은 진리로 맞불을 놓는다. “그게 어떠냐? 정 붙이고 살면 거기가 내 집이지.” 수처작주 입처개진. ‘어디든 주인이 되어 살면 그곳이 참된 자리’라는 뜻의 경구다.
반면 진철은 경란과 정반대 삶을 살았다. 그곳에서 두 자매를 건강히 키워 냈음에도 불구, 그에게 집은 새 집으로 가기까지 잠깐 살면 그만인 어느 곳 하나 내세울 것 없는 공간이었다. 때문에 창도 안 뚫었다. 하지만 세월 속에 진철은 그가 떠나고자 한 헌 집과 닮아 버리고 만다. 이것은 은서도 마찬가지다. “술 좋아하지 구두쇠지 자기만 알지. (중략) 아무튼 속으로 무슨 생각하는 건지 모르겠어. 답답해.” 아버지가 답답하다고 하소연하는 딸의 넋두리다. 이에 경란은 은서 아버지가 아니라 은서를 묘사하는 줄 알았다며 싸움을 건다. 진철이 집에 동화됐듯 시나브로 시나브로 은서 또한 아버지를 닮아 가는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각기 다르다. 그러나 터부시해 마지아니한 대상과 하나되는 것은 둘 모두 같다. 시야를 집에 국한한다면 본작은 ‘집으로 보는 인생’이다. 그렇지만 그 시야를 밖으로 넓히면 ‘집 이야기’는 ‘너가 된 나’의 이야기다. 어떤 대상을 기피하는 일은 ‘무의식적’으로 끌리기에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의 피상일지도 모른다.
아버지와 딸이 서로의 일상에 스며드는 과정은 보는 것만으로도 나를 은서에, 아버지를 진철에 이입시키는 동형성을 띄고 있다. 배우 이유영 또한 진철에게서 무뚝뚝하기만 했던 실제 아버지를 발견했다며 그 공통점을 출연 이유로 꼽았다. 사부곡이 슬픈 이유는 목놓아 부르는 그 대상이 아버지라서다. 기획과 각본을 맡은 윤상숙은 “내가 떠난 집에도 부모님은 항상 내가 있었던 자리를 남겨 두셨다”며, “하지만 내가 사는 집에 부모님의 자리라고는 엄마의 사진 액자를 세운 손바닥만 한 공간이 전부였다”고 술회했다.
집과의 연관도 좋다. 그러나 판단컨대, 처음에 강조했듯, ‘집 이야기’의 결론은 ‘아버지’다. 인생을 논하는 데 있어 아버지가 그 치환에 부족함이 없는 까닭은 아마 그의 헌신과 사랑 그리고 부재가 나를 지탱하는 필수 요소라서일 터. 나는 너가 되고 그렇게 한 세대는 다음 세대로 이어져 나간다. ‘집 이야기’에는 부작용이 하나 있다. 그것은 집 보러 왔더니 집에 대한 감상은커녕 아버지를 향한 애상만 잔뜩 안고 현관을 나선다는 점이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섹션 초청작. 12세 관람가. 92분. 손익분기점 8만 명. 총제작비 3.5억 원.(사진제공: CGV아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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