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은 소설과 달리 팩트(사실)와 실제 경험이 전제돼야 합니다. 이야기와 화자 사이의 거리가 매우 좁은 편이죠. 이번 산문집에 실은 글들은 어느 산문보다 제 일상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바라보려 노력했습니다.”
‘해학의 아이콘’이자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으로 불리는 작가 성석제(59)가 오랜만에 새로 펴낸 산문집 <근데 사실 조금은 굉장하고 영원할 이야기>(문학동네)를 들고 독자들 앞에 섰다. 지난 18일 서울 당산동 한 카페에서 만난 성 작가는 일상과 문학에 대한 경험들을 특유의 경쾌한 입담으로 쏟아냈다. 그는 무엇보다 “소설이든 산문이든 이야기는 일단 재미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단 사람들에게 읽혀야 그 이야기를 통해 정보와 지식도 전달하고 공동체를 결속시킬 수도 있죠. 따분한 이야기와 재미있는 이야기를 구분 짓는 것은 듣는 사람이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상상하고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새 산문집은 성 작가가 그동안 신문이나 잡지 등에 발표한 원고를 엄선해 다듬은 글을 실었다. 자연인으로, 때론 소설가로서 살아오며 느낀 문학과 세상사에 대한 통찰을 풍자와 해학으로 무겁지 않고, 어둡지 않게 풀어냈다. 그는 “글쟁이로서 무엇인가 큰 문학적 결과물을 남겨야 한다는 예술적인 압박과 독자들로부터 작품에 대한 선택과 판단을 받아야 하는 엄정한 시장의 압박을 내 숙명으로 여기면서 살아왔다”며 “문학인으로서 상충되는 두 압박 사이에서 오랜 시간 겪은 망설임과 충돌을 충분히 발효시켜 낸 글들”이라고 설명했다.
1부에는 ‘소설가 성석제’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과 그 속에서 정리한 문학에 대한 사유를 담았다. 작가는 “처음 소설을 쓴 1995년 이후 다시는 시인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게 됐다”며 잠시 ‘시인 성석제’로 살았던 시기를 이렇게 회상한다. “1995년은 단군 이래 최대 호황기라 불릴 정도였던 시기라 집마다 책과 문학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어요. 나 같은 사람도 숟가락을 얹고 시를 써볼 수 있었죠. 이후 시는 더 이상 쓰지 못했지만 그때 영향인지 소설을 쓸 땐 여느 작가들처럼 끈기 있게 눌러 앉아 쓰는 힘보다는 시를 쓸 때처럼 에너지와 자원을 축적해 단숨에 쓰는 습성을 갖게 됐습니다.”
작가는 그동안 음식이나 사진 등에 대한 산문을 많이 써 왔다. 이번 산문집에서도 ‘자연인 성석제’로서 음식과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2부에는 순두부찌개, 비빔밥, 파스타, 누룽지 등에서 찾아낸 자연과 생명, 고향, 인간 본성 등에 관한 글들이 실렸다. 그는 “음식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은 그 음식의 맛을 향상시켜줄 뿐만 아니라 일상 자체를 마냥 재미있게 바꿔준다”고 했다.
‘여행’을 주제로 다룬 4부에 실린 한 산문에서 작가는 “속도가 여행의 질을 결정한다. 주마간산이 아닌 진짜 여행은 이동하는 시공간을 자기화하는 체험”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우리가 성장과 발전이라는 이름만으로 고속으로 달리며 주변의 풍경을 포착해 내지 못하고 빠르게 휘발되며 흘러온 건 아닌지 여행 속에서 되돌아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그는 2004년 출간한 <즐겁게 춤을 추다가>를 개정한 <말 못하는 사람>(문학동네)도 함께 펴냈다. 40대 중반 작가가 바라본 세상과 지금의 세상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말이 워낙 많아지고 또 문제가 되는 세상이 됐어요. 저는 조용히 그 말들을 주워 모아 밥벌이에 써야 되는데 나도 모르게 동조돼 속에 들어 있는 말을 화려한 겉치레로 포장하는 경향도 생긴 것 같아요. 현실의 번잡스러움에 지나온 시간들이 너나 할 것 없이 그대로 노출되고 그렇게 세상도, 나도 바뀌었습니다.”
그의 산문들엔 심각한 상황에서도 한 번쯤은 웃음 짓게 하는 익살이 숨어 있다. 진지함 속에 툭툭 묻어나는 특유의 유머는 읽는 이를 미소 짓게 한다. “기질적으로 누군가를 재미있게 해 주는 것을 좋아하고, 그렇게 하려고 항상 애씁니다. 문학은 그저 주변에서 나직하게 들려오는 소리라고 생각합니다. 세상과 사람에 대해 낮은 목소리로 차근차근 이야기하고 생각하는 공간이 문학이죠. 저는 그 방향대로 세상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유쾌하게 나아가려고 합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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