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경기 용인에서 사촌 형제까지 10남매가 한집에서 같이 자랐는데 내 별명은 ‘떼섭’이었다. ‘섭’자 돌림 이름인데 생떼를 쓰면 당할 사람이 없어서 붙은 별명이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남들보다 고집이 세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 편이다. 스스로 돌이켜봐도 정말 어렸을 때부터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 내 고집은 한결같았다.
프랑스마을 조성사업을 시작하고자 결심했을 때 잘될 거라 믿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나만의 고집과 끈기로 20여 년을 준비해나갔고, 그 과정에서 10여 년을 찾아다녔던 희귀 ‘오르골’을 마주했을 때의 벅찬 감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이렇듯 쁘띠프랑스에 있는 전시품마다 구하는 과정에서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프랑스의 고택을 한국으로 옮겨 오기 위해 갖은 고생을 다 한 일이다.
프랑스를 열 번 이상 찾아가봤지만 적당한 집을 구하지 못했다. 한 번은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지방의 한 부동산을 방문했다. 판다고 내놓은 집을 구경하다 마침내 ‘이 집이다’ 싶었다. 프랑스의 정서와 느낌이 그대로 묻어 있는 집이었다. 이 집을 사서 한국으로 옮기고 싶어 부동산 업자에게 물었더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크게 화를 냈다. 왜 집을 사서 한국으로 옮기려 하는지 이유조차 밝히지 못한 채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오고 말았다.
또 한 번은 프랑스 중부 오를레앙 지방에서 집을 구경하고 마음에 들어 다음번에 프랑스에 갔을 때 그 집을 또 보러 갔다. 하필이면 주말이라 별장 주인이 와 있어서 보여줄 수 없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몰래 훔쳐보려고 시도하다가 도둑으로 몰려 크게 혼이 나기도 했다.
되돌아보면 쁘띠프랑스를 만들기로 결심한 그 순간부터 정말 무식하고 고집스럽게 무언가를 찾아다닌 것 같다. 희귀 오르골부터 프랑스 전통주택까지, 그저 내가 좋아하고 간직하고 싶은 것을 순수하게 좇다 보니 지금 이곳에 와 있는 것이다.
그렇다. 지금의 나 그리고 내가 서 있는 이곳을 만든 건 바로 어린이 마음 같은 순수한 ‘생떼’였다. 반드시 성공하고자 하는 욕심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 남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은, 단순한 생떼 같은 그 마음이 결국 이곳까지 나를 이끌고 온 것이다.
한국 관광이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주변국과의 분쟁으로 인해 외국인 관광객이 줄어들고 시장도 축소됐다. 이런 때일수록 초심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려운 상황에 매몰돼버리는 게 아니라 질적인 성장을 위해 주변을 둘러보는 지혜가 요구된다. 쁘띠프랑스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한국 관광 콘텐츠를 확장하기 위해 이탈리아 마을을 조성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다시 순수한 생떼를 부리러 세상에 나갈 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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