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간판 기업들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삼성 현대자동차 SK LG 등 10대 그룹 중 일곱 곳이 내년 사업계획 ‘밑그림’조차 그리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기업들은 내년 경영환경도 녹록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국내 경기 침체와 미·중 무역분쟁, 한·일 경제전쟁, 환율·유가 변동 등 대내외 변수가 복잡하게 꼬여가고 있기 때문이다. 자고 나면 하나둘 튀어나오는 ‘규제 폭탄’과 친(親)노동 정책, 반(反)기업 정서 등도 기업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부 대기업은 아예 비상경영을 선포했다.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은 지난달 30일 계열사 대표와 주요 임원 150여 명 앞에서 “현실에 부합하지 않는 장밋빛 계획이나 회사 주변 환경만 의식한 보수적 계획 수립은 지양하라”며 “미래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 비상경영 체제로 전환하라”고 주문했다. 삼성그룹은 일본의 경제 보복이 본격화한 지난 7월부터 사실상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경제계 관계자는 “대부분 기업이 미래 비전을 제시하기는커녕 생존을 걱정해야 할 판”이라고 말했다.
“올해도 겨우 버텼는데…”
한국경제신문이 7일 10대 그룹(자산 기준, 공기업·금융회사 제외)의 전략·기획담당 임원을 대상으로 긴급 설문조사를 한 결과 대부분의 기업이 내년을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열 곳 중 일곱 곳은 아직 내년 사업계획 초안조차 마련하지 못했다. 최종안을 만들었다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국내 주요 대기업은 통상 10월 말~11월 초 사업계획 초안을 마련하고, 12월 초·중순께 확정한다. 올해는 진행 속도가 한참 늦다. 일부 회사의 전략담당 임원들이 “후폭풍을 가늠하기 어려운 변수가 너무 많아 내년 초 사업계획을 확정할 수도 있다”고 얘기할 정도다.
10대 그룹 소속 주요 계열사 중 다수는 내년 투자와 채용, 매출, 영업이익 목표를 낮추거나 올해와 비슷한 수준으로 잡을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통상 기업들은 새해 매출과 영업이익 목표를 전년보다 5~10% 늘려 잡는다. 한 전략담당 부사장은 “올해가 바닥이라고 생각했는데, 내년 상황이 더 나빠질 것 같다는 보고서가 계속 나오고 있다”고 했다.
10대 그룹 가운데 일곱 곳이 내년 경영환경이 올해보다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 중 두 곳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 환경이 더 나빠질 것 같다고 전망했다. 올해보다 나아질 것이라고 예상한 곳은 한 곳도 없었다.
쌓여가는 악재
주요 그룹이 내년 사업계획의 윤곽을 잡지 못하는 이유는 대내외 악재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어서다. 글로벌 경기는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한국의 올해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1%대에 머물 전망이다. 10대 그룹 중 다섯 곳은 내년 경영환경의 최대 변수로 ‘국내외 경기 침체’를 꼽았다. 한 경제단체 부회장은 “한국 경제가 일본과 같은 L자형 장기 침체에 들어갔다는 분석이 나오면서 기업들의 걱정이 크다”고 전했다.
대외환경도 나빠지고 있다. 미·중 무역분쟁은 쉽사리 해결될 분위기가 아니다. 각국 정부는 앞다퉈 보호무역주의를 강화하고 있다. 올 하반기 들어서는 일본의 경제 보복도 더해졌다. 10대 그룹 중 세 곳이 ‘미·중 무역분쟁 등 대외여건 악화’를 내년 최대 변수로 꼽은 이유다.
기업의 경영활동을 제약하는 규제도 하나둘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정부가 법령이 아니라 시행령이나 시행규칙을 바꿔 기업 활동을 옥죄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야당의 반대로 규제 관련법의 국회 통과가 어려워지자 국회를 건너뛰겠다는 의도다.
정부의 친노동정책도 계속되고 있다. 최저임금은 지난 2년 동안 29.1% 올랐고, 지난해 7월부터는 주당 최대 근로시간이 68시간에서 52시간(300인 이상 사업장 기준)으로 줄었다. 정부는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을 위한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의결했다. 실업자와 해고자의 노조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등 노동계 요구를 대폭 수용한 법안이다.
기업들은 내년 4월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포퓰리즘(대중인기영합주의)이 극성을 부릴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표심을 노리는 정치권이 반기업 정책을 대거 내놓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경제계 관계자는 “지난 6일 경제 5단체가 경제활성화 법안을 조속히 처리해달라고 호소했지만 현실적으로는 기업 활동을 가로막는 규제법안이 쏟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도병욱/장창민/박상용 기자 dod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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