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 세상을 떠난 부친은 평안북도에서 태어났다. 1945년 해방 이후 공산 치하의 북한에서 월남해 서울에 머물다가 6·25전쟁으로 부산까지 피란해 정착했다. 중국 국경인 압록강에서 출발해 일본과 인접한 대한해협에서 멈췄으니 크로스 컨트리(cross country)를 한 셈이라고 생전에 농반진반으로 말씀한 긴 여정이었다.
피란지에서 굶지 않으려면 중학생도 돈을 벌어야 했기에 부둣가에서 잡일을 했다. 당시 미군 해상수송사령부가 있었던 부산은 보급선의 허브였다. 대형 화물선에서 하역한 군수물자를 미군 터그보트(예인선)와 중소형 선박들이 인천, 포항, 군산 등지로 실어 날랐다. 미군에 고용된 필리핀 출신 선장, 기관장 밑에서 한국인들은 식당, 주유, 청소 등의 잡일을 했다. “우리보다 10배의 임금을 받는 필리핀 사람들이 부러웠다. 어린 나이에도 국력에 따라 개인적 삶이 규정됨을 절실히 느꼈다. 그런데 내가 살아서 우리나라에서 잡일하는 필리핀 사람들을 보게 됐다”고 회고하곤 했다.
연전에 인천에서 출발하는 1주일간의 동북아 크루즈에 탑승한 적이 있다. 국내 관광회사에서 임차한 이탈리아 선적의 전세선이라 승객 3000명은 모두 한국인이었다. 이탈리아 출신 선장, 기관장, 식당·호텔 등 책임자를 중심으로 영국, 인도, 필리핀, 중국 등 28개국 출신 1000명의 승무원들이 공연, 접객, 주방, 청소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세계 각국 사람들이 모인 작은 지구의 주인공은 중·노년에 접어든 평범한 이웃들이었다. 필자로서는 20세기 후반 급속히 진행된 경제성장의 결과물을 일상에서 체감하는 시간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해외 신혼여행 정도는 일찍이 보편화됐고 인천공항은 중등학교 수학여행에서 동남아 골프여행, 동네 산악회의 해외 산행 등 다양한 여행객들로 항상 북적거린다. 그러나 오늘의 풍요는 앞선 세대의 근검절약과 헌신에서 비롯됐다. 현 세대가 이를 망각하고 교만에 빠지면 다음 세대는 빈곤의 유산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빈천은 근검을 낳고, 근검은 부귀를 낳고, 부귀는 교사(驕奢, 교만과 사치)를 낳고, 교사는 음일(淫佚, 방종과 나태)을 낳고, 음일은 다시 빈천을 낳는다.’
20세기 전반 중국에서 후흑학(厚黑學)을 주창한 리쭝우(李宗吾·1879~1944)의 부친이 자식들에게 교훈으로 삼았던 글귀다. 빈천에서 자수성가한 부친의 인생철학이 압축된 문장은 인생유전과 흥망성쇠의 정곡을 찌르고 있다. 빈천한데 근검하기는 어렵지만, 부귀하면서 교만·사치하지 않기는 더욱 어렵다. 교만의 핵심은, 현재 누리는 풍요로운 삶의 조건은 당연하며 앞으로도 유지된다고 믿는 것이다. 한마디로 세상을 우습고 만만하게 보고 살아가는 태도다. 하지만 어제의 빈곤에 대한 망각이 오늘의 교만을 낳고 내일의 빈곤으로 연결됨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이런 과정이 70년 전 부산항에서 일하던 필리핀인과 한국인의 현재 모습에 투영돼 있다.
현재 우리나라가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고 과거로 퇴행하는 현상에는 앞세대의 헌신을 폄하하고 다음 세대의 잠재력을 부인하는 교만과 방종이 저변에 깔려 있다. 이런 현상의 중심에는 소위 X86세대가 자리 잡고 있다. 50대 중반에 이르도록 나이에 걸맞은 식견과 책임감을 갖추지 못하고 젊은 시절에 경도된 시대착오적인 이념의 변두리를 맴도는 화석으로 전락했다. 미래를 향한 변화를 위해서는 사회 곳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X86세대적인 사고방식과 기득권을 타파하고 디지털 시대정신을 호흡하는 역량 있는 다음 세대로의 세대교체가 필요한 이유다.
19세기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칼라일(1795~1881)은 “인간은 역경(逆境)을 이기는 이가 100명이라면 풍요를 이기는 자는 한 명도 안 된다”고 말했다. 기업에서 창업보다 수성이 어렵다는 격언과 일맥상통하는 통찰적 교훈은 시공간을 뛰어넘어 21세기 우리나라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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