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열 한국은행 총재가 “미·중 무역분쟁이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0.4%포인트 끌어내렸다”고 말했다. 수출이 줄면서 0.2%포인트, 투자·소비가 위축되면서 0.2%포인트 성장률을 갉아먹었다는 것이다. 이 총재는 “국제통화기금(IMF)이 미·중 당사국을 빼고는 한국이 가장 큰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했지만 이렇게 안 좋을 줄 몰랐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내년은 올해보다 낫지 않겠느냐”고 했다. 하지만 0.4%포인트 성장률을 앗아간 미·중 무역분쟁은 오래갈 것이란 게 지배적인 전망이다.
일본경제연구센터는 지난 7월 미·중 갈등 장기화에 극적 요소까지 더한 시나리오를 내놨다. 2030년대 전반기에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이 미국을 앞지르지만 2060년에 미국이 중국을 다시 따라잡을 것이란 전망이다. 보호무역주의 지속 여부, 디지털 경제를 향한 구조개혁 성패에 따라 미국이 중국을 다시 넘어서는 시점이 길어지거나 단축될 수 있다고 한 대목은 특히 흥미롭다.
2060년에도 안 끝날지 모를 미·중 갈등을 4차 산업혁명과 맞물린 경제의 대전환과 산업 재편, 주도권 차원에서 본다면 당장의 경기 대응에만 파묻힐 때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 시정연설에서 말한 대로 경기사이클 관점에서 매년 방어적인 확대 예산으로 가다가는 미·중 분쟁이 끝나기도 전에 재정이 거덜나고 말 것이다.
구조적인 전환기를 헤쳐 나가려면 정부가 지금이라도 ‘혁신성장’에 방점을 찍어야 하지만, 문 대통령의 혁신 인식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민간투자가 아니라 재정으로 ‘혁신의 힘’을 키우겠다는 발상부터 그렇다. 대통령은 지난 2년 반 동안 창업국가를 국정과제로 삼고 제2벤처붐 확산전략 등을 추진했다고 하지만, 정부의 과제와 전략 발표로 혁신의 힘을 키울 수 있다면 못해 낼 나라가 없다.
대통령은 “‘공정’이 돼야 ‘혁신’도 있다”며 상법과 공정거래법, 하도급거래공정화법 등의 통과를 촉구했다. 공정도 시대에 맞게 진화해야지, 자율을 죽이는 획일적이거나 복잡한 규제 방식으로 가면 혁신은 불가능하다. 대통령이 지적한 ‘교육 불공정’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AI) 시대 교육혁신으로 질주해도 부족할 판에 학생부종합전형 전면 실태 조사와 고교 서열화 해소, 정시 비중 상향 등 입시제도 개편으로 씨름하는 나라는 한국밖에 없다.
한국 경제위기의 본질은 당장의 성장률 하락보다 잠재성장률 추락에 있다. 국내외 경제 전문기관들 전망에 따르면 ‘2030년대 1%대’ ‘2026년부터 1%대’ ‘2020~2024년 1.2%’ 등 1%대 추락 시기가 빨라져 코앞으로 다가왔다. 이런 상태로는 미·중 무역분쟁 장기화에 버티기도 어렵고, 4차 산업혁명을 따라갈 수도 없다. 경제가 구조적 전환을 못할 정도로 잠재력이 바닥나고 있다는 것보다 더 큰 위기는 없을 것이다.
생산연령인구가 감소하는데 근로시간까지 줄이면 민간투자를 이끌어내고 총요소생산성을 높이는 것 말고는 잠재성장률을 올릴 다른 방도가 없다. 법인세 인하, 투자 세제 지원, 규제 개혁, 노동시장 등 제도 선진화, 기술개발 촉진, 교육 혁신, 정책의 예측 가능성 제고 등이 이에 해당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2019년 구조개혁 연례보고서(Going for Growth 2019)’에서 권고한 구조개혁도 그런 목적이다. OECD는 “지금이 구조개혁의 시간”이라고 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구조개혁을 거꾸로 돌리거나 방치하거나 중장기 과제로 미루고 있다.
김성식 바른미래당 의원은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종합감사에서 “경제정책이 길을 잃었다”며 “한국이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따라가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대로 가면 역사는 문재인 정부 집권기를 ‘잃어버린 시간’으로 기록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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