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살다 보면 이곳의 정체성에 혼란을 느낄 때가 있다. 국명에 ‘사회주의공화국(The Socialist Republic)’을 명기한 나라임을 실감할 일은 거의 없다. 하노이의 일상은 자본주의에 훨씬 가깝다. 하노이가 세계 최악의 미세먼지 도시로 올라선 것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듯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 각자의 오토바이로 자신만의 이익을 좇아 도로 위를 질주한다.
베트남 정부가 웬만한 자본주의 국가 뺨칠 만한 친기업 정책을 펴는 것을 볼 때면 혼란은 가중된다. 지난달 16일 베트남 노동부 장관은 베트남상공회의소(VCCI) 등과 주당 근로시간을 기존 48시간에서 44시간으로 단축하는 노동법 개정안을 논의했다. 주베트남 대사관 소속 이재국 노무관은 “기업들이 경영상 어려움을 호소해 성사된 자리였다”며 “노동부 장관이 노동법 개정 초안에 근로시간 단축안을 넣지 않기로 약속했다”고 전했다. 이달 국회에 상정될 노동법 개정안은 한국 등 외국인투자기업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한 주에 한 번꼴로 열리는 성(省)별 투자 유치 설명회는 기업을 위한 각종 특혜 약속의 ‘경연장’이다. 지방정부의 정책을 중앙정부가 뒷받침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총리도 참석한다. 지난달 30일 중국과의 접경도시인 랑선에서 열린 투자 설명회에도 응우옌쑤언푹 총리가 나왔다. 이날 행사에 연사로 초청받은 김기준 KOTRA 동남아대양주지역본부장은 “총리가 제1의 VIP인데도 인사말은 가장 나중에 하고 지자체에 힘을 실어주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베트남 법인을 담당하는 한 대기업 부사장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베트남의 어떤 점이 좋으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정부가 늘 기업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게 가장 좋다.” 베트남의 친기업 정책은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도 자극하고 있다. 조코 위도도 인도네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국무회의에서 탈중국 기업 33개 중 23개가 베트남으로 이전했다는 통계를 언급하며 규제완화를 촉구했다.
얼마 전 ‘하노이 키즈’라는 자원봉사단체를 통해 하노이 시내 반나절 관광을 한 적이 있다. 영어나 한국어를 배우려는 베트남 대학생들이 무료로 외국인 관광가이드를 해주는 단체다. 이날 만난 하노이국립대 법대생과 하노이무역대 경제학 전공자는 장래 희망으로 “기업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 군인과 관료로 성공한 아버지와는 다른 길을 가겠다고 힘줘 말했다. 이념과 진영 싸움으로 가득한 서울의 뉴스를 보다 불현듯 묻고 싶어졌다. ‘20년 뒤쯤 어쩌면 베트남마저 우리를 추월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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