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그제 국회에서 “국민연금 개편 단일안을 국회에서 결단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소식은 듣는 귀를 의심케 했다. “정부가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반대진영의 (무조건적인) 공격을 받을 게 분명하니 국회에서 논의하고 결정도 내려달라”는 게 박 장관의 말이었다. 정부는 이로써 지난 8월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제출한 복수의 국민연금 개혁안을 그대로 국회에 넘길 것임을 공식화했다. 논란이 거센 핵심 국정현안에 대해 책임지고 해결할 생각이 없음을 대놓고 공언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대통령이 구성한 행정부가 주요 국정의 최종 결정 및 집행권한을 절대적으로 행사하는 대통령책임제를 시행하고 있다. 2년 전 근로시간 단축의 부작용 논란으로 국회가 법제화 논의를 미루자, 정부가 시행령 개정으로 압박하며 주 52시간제 강행을 이끌어낸 것은 대통령책임제의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다. 강압적인 최저임금 대폭 인상도 대통령 지시만으로 밀어붙였다. 건강보험 재정을 위협하면서 의료체계를 심각하게 흔드는 ‘문재인 케어’도 전적으로 정부의 ‘결단’이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건, 당장 달콤한 과실을 따먹을 수 있는 대중영합 조치들을 눈깜짝 않고 쏟아낸 정부가 유독 국민연금 개편 작업은 국회로 떠넘기려는 이유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대로 뒀다가는 조만간 전액 고갈이 불가피한 국민연금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더 내고 덜 받는’ 개편이 불가피한데, 정권의 핵심 지지집단인 민노총 등이 거세게 반대하고 있어서다. 지난해 8월 박능후 장관이 소득대체율을 40%에서 45%로 높이는 대신 보험료율을 9%에서 12%로 올리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국민연금 재정 개선방안을 보고하자,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는 질타와 함께 ‘원점 재검토’를 지시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정부의 정책수립과 집행이 지지세력의 눈치를 살피고, 한줌의 인기에 영합하는 방향으로 왜곡돼서는 안 된다. 국가 구성원들에게 건강한 미래를 위해 필요한 고통분담을 요구하지 않고, 당장 있는 돈을 긁어모아 퍼주는 상황이 지속가능할 리 만무하다. 나라곳간은 오래지 않아 바닥을 드러내고 미래세대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빚더미를 안길 뿐이다. 국정 기준을 ‘국가 백년대계’가 아니라 ‘다음 선거 승리’에 맞춘 정권이 어떤 재앙을 안기는지는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그리스 사례가 생생하게 보여주지 않았는가.
정부는 더 늦기 전에 진정 백년대계를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심사숙고하고, 결단해야 할 것이다.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국정 권한을 포퓰리즘 정책과 반대파 무력화 작업에 제왕적 권력을 휘두르는 것으로 오·남용하고, 정작 국민 모두와 국가의 미래를 위해 반대자들을 설득해가면서 결행해야 하는 일에선 발을 빼는 식이어선 곤란하다. ‘대통령책임제’를 ‘대통령 무(無)책임제’로 망가뜨려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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