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09월 30일 09:58 자본 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이 기사는 09월30일(09:58) 자본시장의 혜안 ‘마켓인사이트’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한국산업은행이 기업의 설비투자 자금 지원을 통한 고용 창출이라는 국책은행의 업무 대신 시중은행과 증권사들로 포화상태인 인수금융(M&A 자금 대출) 시장에 뛰어들어 시장 생태계를 흐린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30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산업은행은 최근 파격적인 이자율을 내세워 잇따라 대형 M&A 거래의 인수금융을 단독으로 주선하고 있다. 국내 1위 골판지 회사인 태림포장의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세아상역의 인수금융 대출 경쟁이 대표적인 사례다. M&A 거래에서 인수회사는 인수자문사에 인수금융까지 맡기는게 일반적이지만 세아상역은 인수자문사인 미래에셋대우 대신 산업은행을 선택했다. 산업은행이 연 3.5% 수준의 파격적인 이자율을 제시한 덕분이다. 시중은행과 증권사들의 이자율보다 40~50bp(베이시스포인트, 1bp는 0.01%) 낮은 수준이다. 인수금융 업계 관계자는 “건당 수천억원의 대출규모를 감안할 때 일반 금융회사들은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강성부 펀드’로 이름을 알린 LK투자파트너스와 에이투파트너스의 삼양옵틱스 인수도 산업은행이 인수금융을 맡는 등 산업은행은 시중은행과 증권사들이 주도했던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 들어오고 있다.
이 같은 변화에 대해 산업은행은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강화로 대기업들이 핵심 원천기술을 확보하는 대안으로 해외 기업 M&A가 떠오르는데 따른 대응이라고 설명했다. 산업은행 관계자는 “기업의 사업재편과 성장동력 확보를 지원하는 것도 정책기관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국내 기업의 해외 M&A 지원이라는 설명과 달리 산업은행이 해외 M&A를 지원한 사례는 국내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SJL파트너스와 KCC, 원익 컨소시엄의 글로벌 3대 실리콘 회사 모멘티브 인수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힘들다. 태림포장, 삼양옵틱스 등 국내 M&A가 대부분이었다. 홍콩계 PEF인 어피너티에쿼티파트너스의 서브원 인수, 글로벌 PEF 운용사인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의 KCFT(LS엠트론 동박·박막 사업부)와 LS오토모티브 채무재조정(리파이낸싱) 당시 유리한 대출조건을 제시해 국내 기업의 해외 M&A를 도운게 아니라 외국계 PEF의 배만 불렸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은행과 증권사들이 산업은행의 움직임을 불만스러워하는 건 국내 인수금융 시장이 민간 금융회사들의 외면으로 국내 기업과 PEF가 M&A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국내 인수금융 이자율이 우리나라보다 기준금리가 낮은 미국과 유럽 시장보다 훨씬 낮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하다. 또다른 인수금융 업계 관계자는 “산업은행의 진입이 경쟁에서 쳐진 은행과 증권사의 이탈을 초래하는 시장실패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산업은행은 2014~2015년에도 인수금융 영업을 강화했다가 ‘정책금융회사가 본래의 역할 대신 일반 금융시장의 생태계를 뒤흔든다’는 지적에 비중을 줄였다. 당시는 정부의 지급보증을 받아 저리에 조달한 산업금융채권(산금채)이 산업은행의 무기였다. 초저금리 시대가 장기화하면서 현재 산업은행과 시중 은행 및 증권사의 조달비용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산업은행이 일반 금융회사들이 따라갈 수 없는 수준의 저리를 내거는 건 정부의 지급보증만 믿고 채무불이행 가능성을 면밀하게 검증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목소리마저 나온다.
산업은행이 인수금융 시장으로 눈을 돌린 건 올초 네크워크금융단을 신설해 자본시장 부문의 인수금융과 신디케이션(여러 은행으로 구성된 대주단이 공통의 조건으로 일정 금액을 빌려주는 중장기 대출) 업무를 이관하면서부터다. 한 은행 관계자는 “경기악화로 대기업의 대규모 설비투자가 줄어 신디케이션 시장이 개점휴업 상태다보니 산업은행이 실적을 채우기 위해 인수금융으로 눈을 돌린 것”이라고 말했다.
정영효/이동훈 기자 hug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