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의 발등에 불이 떨어졌습니다. 일본이 대(對) 한국 수출규제를 본격화하고 있는 가운데, 소재·부품 국산화를 시급히 완료해야 하기 때문이죠. 정부가 관련 예산을 늘려준 것은 반가운 일이지만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입니다.
서울지역의 한 공학 교수는 “최근 대전의 한 연구소를 방문했는데 정부가 특수 소재를 10개월 안에 개발하라고 독촉했다더라”며 “그렇게 쉽게 국산화할 수 있었다면 굴지의 대기업들이 왜 생돈을 들여 수입해 왔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다른 연구소에도 확인해보니, 정부 쪽에서 ‘10개월 내 완수’ 목표를 여러 곳에 가이드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지난 7월 초부터 일본의 무역 보복이 시작됐으니 내년 4월까지 시간을 준 겁니다. 우연의 일치일 수 있으나 내년 총선 시기와 겹칩니다.
각 연구소 및 기관장들의 말을 종합하면, 우리나라 연구소와 기업들은 ‘파이브-나인’(순도 99.999%)급 기술의 경우 상당부분 확보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제는 ‘세븐-나인’(순도 99.99999%) 정도의 순도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일본이 가장 앞서 있지요.
파이브 나인과 세븐 나인 간 기술 격차를 좁히는 데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한 기관장은 “10개월 내 순도 ‘세븐 나인’이 가능한 품목이 극히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수 년에서 수십 년동안 집중해도 쉽지 않다”고 했습니다.
대표적인 이유로 “우리나라엔 일본과 달리 소재·부품 분야에선 국가대표급 연구자가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일본과는 연구 토양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죠. 그는 “연구개발자 중 실력이 뛰어난 사람은 관리자로 승진하고, 연구 실적이 좋은 대학 교수들은 계속 바뀌는 국가 프로젝트(연구비)를 좇아 집중 전공 분야를 바꾸기 마련”이라며 “정부출연 연구기관들이라 해도 프로젝트 베이스여서 특정 연구에만 매달릴 수 없다”고 단언했습니다.
정부가 공언하고 있는 ‘소재·부품·장비의 단기 국산화’ 전략에 큰 기대를 하지 말라는 솔직한 발언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다만 지금의 상황이 국내 연구개발(R&D) 환경엔 전화위복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는 “작년만 해도 국가의 예비타당성 조사에서 떨어졌던 기초과학 연구 프로젝트가 갑자기 탄력을 받아 연구비를 확보할 수 있게 됐다”며 “기초 연구에 대한 범정부 차원의 관심이 환기되면서 일단 해보자는 분위기가 형성된 건 적지 않은 수확”이라고 했습니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 확대는 긍정적이지만 지나친 조급증은 실망을 안겨줄 수 있어 걱정”이란 이 기관장의 목소리에도 정부가 귀를 기울이면 좋겠네요.
조재길 기자 ro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