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했다. 걸프전이 터지자 국제 유가는 배럴당 30달러 수준에서 하루 만에 40달러 수준으로 10달러나 뛰었다. 지난 14일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시설이 드론(무인항공기) 공격을 받자 이 같은 일이 다시 벌어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사우디 석유 생산이 당장 반토막 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어서다. 일각에선 중동 정세가 악화돼 미국과 이란의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거나 전쟁이 터지면 배럴당 100달러를 웃돌 것이란 관측도 내놓고 있다.
사우디 하루 570만 배럴 타격사우디 석유시설이 공격받은 것은 이날 새벽 4시께다. 사우디 동부 아브카이크 탈황 석유시설과 쿠라이스 유전이다. 아람코가 소유한 두 곳이 드론 공격을 당해 불이 났다. 압둘아지즈 빈살만 사우디 에너지장관은 “각 시설 가동을 당분간 중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아민 나세르 아람코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폭파 공격 당일 화재를 진압했으며 시설을 재가동하기 위해 수리 중”이라는 성명을 냈다. 이번 공격으로 인한 인명 피해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압둘아지즈 장관에 따르면 아람코는 이번 공격으로 인해 하루평균 원유 약 570만 배럴 생산이 타격을 받게 됐다. 하루평균 기준 사우디 산유량의 절반 이상, 세계 원유 공급량의 5% 이상이다. 사우디는 세계 원유 공급의 약 10%를 차지한다. 석유수출국기구(OPEC)에 따르면 사우디는 지난달 하루평균 원유 980만 배럴을 생산했다.
아브카이크 단지와 쿠라이스 유전은 세계 원유시장의 주요 공급 기지다. 아브카이크 단지는 단일 시설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세계 원유 공급량의 7~8%가 여기서 탈황·정제를 거친다. 사우디는 수출 원유 대부분을 아브카이크 단지에서 처리한다. 쿠라이스 유전은 사우디에서 두 번째로 큰 유전으로 세계 원유 공급량의 약 1%를 차지한다.
시장조사업체 IHS마킷의 OPEC 전문가 로저 디완 부사장은 블룸버그통신에 “아브카이크 단지 등은 사우디 원유 생산 체계의 심장부”라며 “이번 화재는 사우디 원유 생산에 심장마비가 일어난 것과 마찬가지”라고 분석했다.
“유가 바로 10달러 오를 수도”전문가들은 이번 공격이 세계 원유 가격을 뒤흔들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세계 원유 공급량이 하루평균 수백만 배럴 규모로 감소한 것은 걸프전 이래 처음이다. 걸프전 때는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원유 생산시설이 폐쇄돼 원유 공급량이 하루 약 400만 배럴 줄었다.
WSJ는 “사우디는 세계에서 원유 수출량이 가장 많은 나라”라며 “사우디 원유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세계 경제에 미치는 파급력이 클 것”이라고 분석했다. 앤드루 리포 리포오일협회 사장은 CNBC 방송에서 “주말 이후 원유시장이 개장하면 시초가가 배럴당 5~10달러가량 오를 것”이라며 “특히 사우디 원유를 하루 400만 배럴가량 소비하는 아시아 지역에 미치는 영향이 클 것”이라고 내다봤다. 케빈 북 클리어뷰에너지 대표는 “자체 모델 분석 결과 유가가 배럴당 10달러 정도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사우디와 미국 등은 일단 원유 시장이 불안해질 경우 기존에 비축해둔 원유를 시장에 푼다는 계획이다. 압둘아지즈 장관은 “시설 가동 중단 기간에 원유 공급 부족분은 보유 중인 재고로 보충할 것”이라고 밝혔다. 사우디는 자국을 비롯해 네덜란드, 일본, 이집트 등에 있는 저장시설에 원유를 비축해 두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도 이날 “원유시장이 불안해지면 전략비축유를 시장에 풀 수 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WSJ에 따르면 미국의 전략비축유 규모는 6억3000만 배럴에 달한다.
WSJ는 “미국이 원유시장 불안정을 막기 위해 셰일업계의 증산을 유도하거나 OPEC 등 산유국에 증산 압박을 가할지 모른다”며 “기존 산유국 제재를 완화해 세계 원유 공급량을 늘릴 수도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국제 유가를 더 뛰게 할지는 미국과 이란의 긴장이 어디로 흘러가느냐에 달려 있다. 상황이 최악으로 치달아 전쟁이 터지면 국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이상으로 치솟을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미국 월가에서 나오고 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