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로계약서 한 통 전체를 그대로 복사해 붙여넣고 ‘분석하기(analyze)’ 버튼을 눌렀다. 10초도 안 돼 계약당사자, 기간, 금액과 같은 주요 정보에 대한 요약과 더불어 계약서에 어떤 조항이 누락됐는지가 떴다. 위험 요소를 발견해 이유와 대처 방안을 알려주고, 관련 법령이나 판례까지 연결해줬다. 지난달 29일 ‘알파로 경진대회’에서 인간 변호사들에게 승리해 법조계 안팎에서 화제가 된 법률 인공지능(AI) ‘C.I.A.(contract intelligent analyzer)’ 얘기다.
지난 5일 서울 역삼동 인텔리콘 메타연구소 사무실에서 만난 임영익 대표(변호사·사법연수원 41기·사진)는 C.I.A.를 시연하며 “근로계약서 분석 기능만 놓고 보면 인간 변호사 수준에 육박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2010년 설립된 메타연구소는 국내 유일무이한 법률 AI 개발업체다. 컴퓨터공학, 수학 등 AI 관련 전문가와 변호사들이 5년 동안 밤낮으로 협업해 C.I.A.를 탄생시켰다. 임 대표는 “수백만 개의 법률 자료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근로계약서를 입력해 학습시켰다”며 “앞으로 부동산계약서 같은 생활 필수 영역으로 분석 기능을 확대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C.I.A.보다 먼저 태어난 지능형 법률 종합 시스템 ‘아이리스’와 법률 검색 엔진 ‘유렉스’ 등도 메타연구소가 개발한 법률 AI다. 예컨대 아이리스는 부정청탁금지법(김영란법)의 위반 여부를 판단할 때 몇 명이 식사를 한 뒤 식사비용으로 얼마가 나왔고, 공무원이 얼마를 부담했는지 등의 숫자 몇 가지를 입력하면 수초 만에 답을 내놓는다. 유렉스에 “학교에서 왕따를 당해 자살했다”는 문장을 입력하면 단 3초 만에 사립학교법, 학교폭력예방법, 학교안전사고법 등 모든 관련 법령이 검색된다. 임 대표는 “올해 말 전문가용 유렉스 2.0 버전을 출시할 예정”이라며 “로펌뿐 아니라 사내변호사를 고용하고 있는 일반 기업들도 뜨거운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AI가 변호사를 대체할 수 있을까. 임 대표는 잠깐의 고민도 없이 “아니다”고 답했다. 그는 “AI는 단순 작업을 맡는 ‘타임 세이빙 머신(시간을 절약해주는 기계)’일 뿐, 작업의 ‘퀄리티(질)’를 높이는 것은 인간 변호사의 영역”이라며 “AI가 단 몇 초 만에 정리해 준 법령과 각종 자료를 가지고 변호사들이 법률적 창의력을 발휘하면 훨씬 효율적인 작업이 가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변호사 외에도 검사들은 피의자에게 어떤 법률을 적용해야 할지 검토할 때, 판사들은 법정에서 제출된 자료를 분석하거나 양형 판단에 AI를 활용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임 대표는 “이론적으로 판결문 100만 개만 있으면 거의 완벽한 AI를 만들 수 있다”며 “그런데 우리 법원은 하급심 판결문을 극소수만 공개하고 있어 학습 데이터가 부족하다. 이대로라면 수십억 개 판결문 데이터를 공개한 중국에 따라잡힐 판”이라고 우려했다.
서울대 생명과학과 출신인 임 대표는 미국에서 뇌과학을 공부하고 돌아왔다. 법률 AI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사법시험을 봐 합격했다. 지금의 연구소는 사법연수원생 시절 세웠다. 임 대표는 “한국과 법제가 비슷한 일본으로 수출도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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