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침체의 강력한 신호로 여겨지는 미국 국채 2년물과 10년물 금리의 역전 현상이 나타났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6월 이후 12년여 만이다. 아시아와 유럽 ‘성장엔진’인 중국과 독일의 경제 악화로 글로벌 경기 침체에 대한 공포가 커지면서 미 국채 장기물에 자금이 쏠렸기 때문이다. 미 다우지수가 올 들어 가장 큰 폭으로 떨어지는 등 금융시장이 크게 요동쳤다.
1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채권시장에서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장중 한때 연 1.619%로 2년물 금리(연 1.628%)를 밑돌았다. 30년물 국채 금리는 사상 최저인 연 2.0% 이하로 급락했다.
독일의 2분기 국내총생산(GDP)이 전 분기 대비 0.1% 감소하고, 중국의 지난달 산업생산 증가율이 전년 동기 대비 4.8%로 17년 만에 최저로 떨어지자 장기물 채권에 투자자들이 몰렸다. 장기채는 통상 단기채보다 수익률(금리)이 높지만, 경기 침체가 닥치면 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크레디트스위스에 따르면 1978년 이후 미 국채 2년물과 10년물 간 금리 역전은 다섯 번 발생했고, 평균 22개월 만에 모두 경기 침체로 이어졌다. 이날 뉴욕증시에서 다우지수는 800.49포인트(3.05%) 폭락했고, S&P500지수는 2.93%, 나스닥지수는 3.02% 내렸다.
한국 채권시장에서도 장단기 금리 역전이 임박했다. 지난 13일 국고채 3년물(연 1.150%)과 10년물(연 1.229%) 간 금리 차는 0.079%포인트였다. 금융위기 때인 2008년 8월 12일(0.060%포인트) 후 11년 만에 최소 수준으로 좁혀졌다.
獨·中 등 실물경제 잇단 파열음…"美 금리역전 뒤엔 예외없이 침체"“경기침체 위험을 알리는 핵심 지표가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이후 가장 큰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월스트리트저널)
미국 국채 2년물과 10년물 금리가 역전되는 것은 경기침체기에 들어선다는 확실한 신호로 인식된다. 과거 사례에서 거의 예외없이 금융위기 등 침체기가 불어닥쳤다. 14일(현지시간) 12년 만에 2년물과 10년물의 금리 역전 현상이 다시 나타나자 세계에 경기침체 공포가 엄습한 이유다.
독일의 2분기 마이너스 성장과 중국의 지난달 산업생산 증가율 감소 ‘성적표’를 받아든 투자자들은 미·중 무역전쟁이 세계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확실히 깨닫게 됐다. 안전자산 쏠림 현상이 깊어지면서 마이너스 금리로 떨어진 장기물 국채까지 마구 사들이고 있다.
12년 만에 뜬 경기침체 신호통상 만기가 긴 채권은 불확실성을 반영해 금리가 더 높다. 하지만 미 국채 10년물 금리는 이달 들어 2년물과의 차이가 10bp(1bp=0.01%포인트) 이하로 좁혀졌다. 지난 1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중국산 수입품 3000억달러어치에 대한 관세 부과를 발표하자 경기가 악화돼 향후 금리가 떨어질 것으로 보는 투자자가 증가해서다.
이런 상황에서 이날 유럽연합(EU)의 맹주인 독일의 2분기 국내총생산(GDP)이 전분기 대비 0.1% 감소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아시아에선 중국의 7월 산업생산 증가율이 지난해 같은달 대비 4.8%로 17년 만에 최저로 떨어진 것으로 집계되자 투자자들은 충격을 받았다. 망설임 없이 주식을 내다팔고 안전자산인 미 국채 장기물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뉴욕 채권시장에서 이날 오전 7시 10년물 금리가 급락해 2년물과의 역전이 발생했다. 샌프란시스코연방은행에 따르면 2년물과 10년물 금리 역전은 1955년 이후 총 아홉 번 발생했다. 단 한 번만 빼고 모두 일정한 기간(6~24개월) 뒤 침체를 겪었다.
이어 오전 9시30분 뉴욕증시가 개장하자 전광판은 새빨갛게(하락) 물들었다. 미국이 전날 9월 관세 부과를 예고한 3000억달러 규모의 중국산 수입품 중 스마트폰 등 절반이 넘는 품목에 대한 부과를 연기했지만, 중국은 여전히 관세 전면 철회를 주장하고 있다는 소식도 악재로 작용했다.
다만 이번 금리 역전을 반드시 경기침체의 전조로 볼 필요는 없다는 신중론도 있다. 재닛 옐런 전 미국 중앙은행(Fed) 의장은 “수익률 곡선 역전이 이번엔 잘못된 침체 신호일 수 있다”고 말했다. 지난 몇 년간 수차례 양적완화(QE) 속에 장기물 금리의 높은 ‘기간 프리미엄’이 줄었다는 얘기다. 모하메드 엘에리언 알리안츠 고문도 “미국의 상대적 경기 호조로 해외 자금이 미 국채에 몰리면서 장기채 금리가 급락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세계 곳곳 성장률 둔화시장이 미국 국채의 금리 역전에 더 크게 반응한 건 이미 세계 곳곳의 실물 경제에서 파열음이 나고 있기 때문이다. 자동차산업 비중이 큰 독일은 중국 자동차시장이 얼어붙자 2분기 성장률이 마이너스로 추락했다. 브렉시트(유럽연합 탈퇴) 혼란을 겪고 있는 영국도 지난 2분기 -0.2% 성장을 기록해 2012년 이후 최악의 성적을 냈다. 뉴욕타임스는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를 보면 세계 2~5위 경제인 중국, 일본, 독일, 영국의 경제 활동이 모두 둔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새로운 성장엔진으로 꼽히던 브릭스(BRICS: 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남아프리카공화국)도 마찬가지다.
CNN은 거시경제 지표를 감안할 때 브라질이 2분기 침체에 빠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중국과의 무역거래 비중이 높은 싱가포르는 2분기 GDP가 3.3%(연율 환산) 감소했다. 반정부 시위로 홍역을 치르고 있는 홍콩 경기도 차갑게 식고 있다. 공항 폐쇄까지 겪은 홍콩은 자칫 금융허브 지위를 상실할 가능성까지 제기된다.
홍콩 반정부 시위에 ‘노딜 브렉시트’ 가능성, 한·일 갈등, 이탈리아 연정 붕괴, 남미에서 되살아나는 포퓰리즘 등이 모두 미·중 무역전쟁과 함께 글로벌 경제의 불확실성을 키우고 있다. WSJ는 “자국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탈(脫)세계화 정책이 가져온 무역전쟁 등이 세계 경제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다”고 지적했다.
뉴욕=김현석 특파원 realis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