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재 기자] 5월19일 종영작 ‘예쁜 누나’ 윤진아 役
절대 꿀리지 말라는 친구 서경선(장소연)의 말에 윤진아(손예진)는 거금 32만 7천 원을 들여 새 옷을 장만한다. 물론 “3개월” 무이자 할부는 필수다. 하늘거리는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남해 데이트를 언급하는 윤진아에게, 그간 결별을 종용해온 애인 이규민(오륭)은 그와의 연애를 곤약에 비유한다. 애인에게 “니 맛도 내 맛도 아닌 닝닝함에 어정쩡” 하기까지 한 곤약 취급을 받는 손예진이라니. 이쯤 되면 장르가 판타지다.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밀회’, MBC ‘하얀거탑’ 등을 만든 안판석 감독 약 3년 만의 복귀작이다. ‘연출 안판석’이라는 자막이 없더라도 ‘어? 안판석 작품이네?’를 외치게끔 하는 거장의 신작에서, 손예진은 동생 서준희(정해인)를 만나 사랑은 “한없이 아낌없이 한 사람만을 위해서 모든 걸 쏟아내는 마음”임을 깨닫는 서른다섯 윤진아를 연기했다. 배우는 작품은 끝났지만 윤진아의 성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손예진의 말처럼 16부작은 인간 윤진아가 인생에서 겪어낼 삶과 사랑의 고작 일부다. 마찬가지로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는 손예진이 겪어낼 연기 인생의 빛나는 어느 한순간이다.
윤진아와의 차이점으로 솔직한 성격을 언급한 손예진은 어떤 질문에도 단답하는 경우 없이 “음”, “어” 등의 추임새와 함께 답을 길게 전했다. ‘멜로 퀸’으로 유명한 그가 경력 17년에 달하는 인터뷰 전문가임이 새삼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1회 초반부가 기억에 남는다. 윤진아는 점원에게 3개월 무이자 할부를 얘기하는 평범한 직장인이다. 애인에겐 곤약 취급까지 받는다.
1회가 참 중요하다. 인물이 어떻게 나오는지, 이 드라마는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지 시청자 분들께서 예의 주시하신다. 그래서 1회가 부담스러웠다. 왜냐하면 윤진아를 연기하는 손예진 아닌가. 그래서 시청자 분들께서 나를 윤진아로 봐주시기까지의 시간을 단축시키는 게 내 목표고 목적이었다. 직장인의 평범한 일상을 얼마만큼 리얼하게 그릴 수 있고 연기할 수 있을지 그 디테일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오랜만에 드라마 하는 거니까 잘해야지!’란 생각은 독(毒)이 될 거라고 봤다. 표현이 상투적이지만 최대한 내추럴하게 보이길 희망했다. 어느 순간 손예진이 아닌 윤진아로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답답하다는 평가를 받은 인물이다, 윤진아는.
나도 손예진이란 사람이 아직 어떤 사람인지 모르듯 윤진아 역시 어떤 인물인지 아직 모르겠다. 아주 착한 사람인 것은 맞다. 결과적으론 누군가에게 상처를 줬을지 몰라도, 진아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안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혼자 아파하고 그냥 견딘다. 솔직하면 더 편했을 텐데, 솔직하지 않게 얘기하는 순간이 많았다. 나도 어느 지점에선 답답했다. 과감히 솔직하게 얘기하길 바랐다. 기존의 캐릭터는 어떤 아픔을 겪으면 아주 빨리 성장해 나간다. 갑자기 못하던 것을 잘하게 된다. 우리가 보고 싶은 인간의 모습이다. 실제로 한 사람이 태어나서 어디까지 성장하고 죽을지 난 잘 모르겠다. 이번 드라마를 하면서 계속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게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진아의 성장 중에 작품이 끝난 거 같다.
-손예진과 윤진아. 뭐가 다르고 뭐가 비슷한가?
난 아주 많이 솔직한 사람이다. 상대가 상처를 받더라도 솔직히 얘기하곤 한다. 그런데 진아는 다 삼키는 사람이다. 정작 자기 얘기를 한 건 몇 안 된다. 상처와 아픔을 주고 싶지 않은 진아가 어느 지점에선 이해가 가더라. 그래서 좀 짠했다. 비슷한 것은 나이, 미혼, 형제 관계 등이다. 친한 친구가 있다는 것도 비슷하다. 성격이 많이 다르다.
-삼키는 성격이지만, 사랑만큼은 저돌적인 윤진아다. 거절을 두려워한다는 서준희의 얘기를 듣고 먼저 손을 잡는 저돌성을 보였다. 배우 본인은 어떤가?
어휴. 난 못 한다. (웃음) 뿌리치면 어떡하나. (손예진이 손을 잡는데 누가 뿌리치나?) 그건 아닌 것 같다. 모르겠다.
-손깍지를 끼며 윤진아는 병나발을 분다. 연출된 지점이었나?
감독님께서 구체적 지시를 내려주시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행동 동선 등은 상황에 맞춰서 자연스럽게 한다. 그 신의 경우 미리 집에서 생각하진 않았다. 현장에 갔는데, 손을 잡는 게 어색하니까 자연스레 마시게 되더라. 즉흥적인 애드립이었다.
-컷을 외치지 않고 배우가 어떤 연기를 더 하는지 지켜보는 것이 안판석 감독의 연출 특징이라고 들었다. 본방송에 사용된 애드립이 있나?
많았다. 뒤에 나오는 건 거의 애드립이었다. 대본에 있는 대사를 충분히 하고 난 다음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다. 그래서 생각을 많이 해야 했다. (윤)진아가 예쁘게 하고 선보러 가는 신이 있다. 어떤 상황에도 꾸밀 수 있는 건 다 꾸미는 게 여자라고 봤다. 머리는 감고, 머리는 빗고 가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봤다. 그럼에도 한 번은 옷 이야기를 해야겠더라. ‘진아는 왜 저렇게 예쁘게 입고 가는 거야? 남자한테 잘 보이려고?’란 억측에 대한 걱정이 있던 듯하다. 그래서 (정)해인 씨한테 ‘근데 왜 이렇게 예쁘게 하고 갔어?’란 애드립을 부탁했다. ‘예뻐? 나 이거 선 볼 때마다 입는 옷인데’ ‘선 볼 때마다? 선을 많이 봤나봐?’ ‘누나가 나이가 몇이니? 볼 만큼은 보겠지?’ 전부 다 애드립이었다.
기자간담회에서 안판석 감독은 손예진을 복서 무하마드 알리에 비유했다. 촬영장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마치 링에 오르는 복서처럼 보였단다. 연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는 것이 눈에 보인다고도 했다. 함께 호흡을 맞춘 배우 정해인 역시 손예진이 대기 후 현장에 임하는 모습을 장면으로 찍어 놓고 싶다고 바람을 밝혔다.
-복서 손예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중요한 신을 앞두고 손을 씻을 때 어떤 때는 수술을 앞둔 진짜 의사가 된 기분이다. 곧 현장으로 가서 그 신을 찍어내야만 하는 거다. 어느 누구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이겨내야 되고, 해내야만 된다. 웃길 수도 있지만 작품을 할 때마다 목숨 걸고 하고 있다.
비장한 배우 손예진이 가장 힘듦을 느낀 작품은 영화 ‘덕혜옹주’였다. 역사적 인물의 일생을 그려내는 것에 부담을 느낀 배우는 오전 5시에 일어나 놀이터를 거닐며 마음을 다잡았다는 후문. 그는 만약 ‘덕혜옹주’가 흥행에 실패한다면 그것은 곧 동류 영화의 맥이 끊기는 것을 의미한다는 생각에 어깨가 아주 무거웠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여배우 위기론은 충무로의 오랜 화두다. 그리고 여배우 위기론의 배경에는 남성 배우 옆에 수동적으로 자리한 여성 배우가 있다. 손예진은 다르다. ‘덕혜옹주’부터 시작해 ‘비밀은 없다’ ‘지금 만나러 갑니다’ 등 여성 배우가 맡은 역할이 남성 배우의 그것보다 더 돋보이는 작품을 선택해오고 있다. 흥행은 물론이다.
주체적 역할은 나에게 정말 중요한 지점이다. 역할이 어디까지 작품에 영향을 끼치는지, 어디까지가 주동적이고 수동적인지, 그 수동적 역할 안에서 표현할 수 있는 게 무엇인지 전부 다 중요하다고 본다. 이제 곧 나오는 ‘협상’이란 영화를 예로 들겠다. 협상을 하는 여자 경찰관 역할이다. 이런 장르를 보면 주체적이고 뭔가를 이끌어가는 여자 역할이 별로 없다. 그게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작품을 만나면 잘 해내야 된다는 생각이 들고,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 물론 주체적 역할이 선택의 첫 번째 이유는 아니다. 그럼에도 선택에 있어서 중요한 지점은 맞다.(사진제공: 엠에스팀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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