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재 기자 / 사진 bnt포토그래퍼 송다연] AJ는 시윤이 됐다.
JTBC ‘투유 프로젝트-슈가맨2’는 추억을 발굴하는 프로그램이다. 추억은 불씨가 되어 가수의 원동력이 된다. 밴드 마이선셋(MySunset)의 보컬이자 그룹 파란(PARAN)에서 에이스(ACE)로 활동한 최성욱에 이어 또 한 명의 파란 멤버 시윤을 만났다. 당시 AJ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그는 “성욱이 형도 여기 앉았나요?” 하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만 13살 나이로 데뷔해 화제를 모은 AJ는 이제 싱어송라이터 시윤이 됐다. 하지만 ‘아이돌 출신 싱어송라이터’라고 단순히 요약하기에 그의 과거는 풀어낼 이야기가 너무 많다. 방송에서 시윤은 “그룹 활동을 마치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 중이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그룹은 오직 파란만을 지칭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는 파란의 AJ이자, 그룹 유키스(U-KISS)의 AJ였다. 시윤의 아이돌 활동 기간은 약 8년에 달한다.
시윤은 4월13일 새 미니 앨범 ‘큐비즘(CUBISM)’을 발표했다. 이미 유키스 시절부터 음악으로 그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두각을 드러냈던 시윤. 그간 시윤은 다양한 색의 크레파스로 열심히 낙서를 그려왔다. “어떤 색이 가장 저와 어울리는 색인지 알기 위해서 막 그려봤던 거 같아요.” 이제 그는 약속된 성공을 버리고 외롭고 낯설지라도 시윤만의 길을 걷고자 한다. 자신의 색깔로 단어 ‘공감’을 언급한 시윤을 bnt뉴스가 만났다.
▶[인터뷰①]에서 이어집니다.
[인터뷰①] 파란 AJ 시윤이 손에 쥔 한 묶음의 크레파스 (기사링크)
[인터뷰②] 파란→유키스→싱어송라이터 시윤이 찾은 “나만의 나” (기사링크)
시윤은 첫 미니 앨범 ‘서리얼, 벗 나이스(SURREAL, BUT NICE)’의 선공개곡 ‘여우’를 공개하며 “제2의 데뷔”를 언급했다. 제1의 데뷔는 파란에서 이뤄졌다. 그는 2월11일 JTBC ‘투유 프로젝트-슈가맨2’에 출연, 파란 10년 만의 재결합에 힘을 보냈다.
“감회가 남달랐어요. 어렸을 때의 저는 백 코러스만 했지 노래 파트도 없었어요. 상대적으로 실력이 부족했거든요. 그런 제가 네오 형 대신 형들과 나란히 서서 저만의 파트를 저만의 목소리로 부르니까 감정이 묘하더라고요.”
시윤은 2005년 당시 래퍼로서 파란에 합류했다. 한국외국인학교에 재학 중이던 소년 시윤은 힙합 바지를 입고 랩을 하는 선배의 모습에 반해 랩을 배우고 따라했다. “오디션 붙은 배경이 특이해요. 누가 봐도 제 랩 실력이 좋지 않았어요. MR과 AR의 차이도 몰랐고요. 반주를 안 갖고 가서 조PD 선배님의 ‘친구여’를 AR로 틀고 불렀어요. 운이 좋았죠.”
파란의 잠정적 해체 이후 AJ는 유키스에 합류했다. 또 다른 아이돌 생활의 시작이었다. 유키스에 들어가기 전 시윤은 미국 컬럼비아 대학교 입학을 준비했고, 남성 듀오 긱스(Geeks) 같은 그룹을 꿈꿨다. 그러나 결국 유키스였다.
“제 또래에 맞게 2년 반 동안 컬럼비아 입시 공부를 했어요. 왠지 모를 자신감에 대중 힙합 그룹을 만들고 싶다며 소속사 측에 PPT도 보여드렸고요. 하지만 준비 중간 회사 측에서 유키스 참여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부탁을 드렸죠. 학교와, 하고 싶은 음악만큼은 존중해달라고요. 그렇게 유키스에 들어갔어요. 다시 아이돌 생활을 시작한다는 거부감보단 경험에서 오는 무서움이 컸어요. 회사가 또 그룹을 버리진 않을지 염려했습니다.”
이후 시윤은 약 8개월간 유키스 활동을 중단했다. 대학교 입학이 이유였다. “안 가길 바라셨어요. 하지만 학교는 제가 절대 포기 못할 부분이었습니다. 학업 욕심이 많아요. 세상에 궁금한 것도 많고요. 지식만큼은 학교에서 배울 수 있는 게 크잖아요. 또 제가 워낙 심리학에 관심이 많아요. 학교는 무조건 가야겠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어요.”
시윤은 KBS2 ‘아이돌 리부팅 프로젝트 더 유닛’에 출연해 ‘지니어스 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래퍼 산이(SAN E)는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 중인 그를 두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분”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우기도. 그러나 자작 랩 무대가 끝난 후 “뭔 말을 하는데 무슨 말 하는지 모르는 경우”라는 독설이 비수처럼 가슴에 날아와 꽂혔다.
“악마의 편집이었어요. 산이 씨가 발음 얘기 전에 ‘랩 스타일도 좋고, 리듬도 잘 타고, 랩 너무 잘 들었다. 그런데 굳이 스타일의 차이가 있다면’이라고 말씀하셨거든요. 문제의 심사평은 그 다음이었어요. 탈락 폄하는 아니에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경험으로 한동안 ‘멘붕’이 온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대중에게 인정받은 아티스트 분들께서 심사를 해주신 거잖아요. 좋은 상처예요. 흉터로 남겠지만 좋은 경험이 될 거고요.”
유키스의 일본 인기는 아직 현재 진행형이다. 부와 명예를 박차고 ‘0부트’라는 상처까지 감내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어려서부터 꿈이 없으면 죽은 삶이라고 생각했어요. 제 꿈은 저만의 음악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PPT까지 제출했고요. 하지만 단 한 번도 이뤄졌던 적이 없어요. 공허한 말만 메아리쳤죠. 한(恨)이 가슴 안에 계속 맺혔습니다. 루프탑컴퍼니는 가수 시윤이 정체성을 찾는 데 큰 힘이 돼줬어요.”
배우는 시윤의 또 다른 꿈이다. 최근 그는 인스타그램에 촬영 비하인드 컷을 올리며 ‘심판자-더 저지(The Judge)’ 참여 사실을 알렸다. “10대 때 꿈은 연기자였어요. 싱가포르 연기 학교와 파란 연습생을 두고 무엇을 할지 고민했습니다. 그때의 저는 연예계에 들어가면 연기도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나 봐요. 어렸을 때 꿈인 연기자를 다시 욕심내고 싶었습니다. 때문에 독립 영화로 연기 첫 발을 디뎠어요. 배우 시윤도 기대 부탁합니다.”
인스타그램에는 ‘미쟝센영화제’를 노리는 배우 시윤과 더불어, 노래하는 가수 시윤도 있다. 시윤을 보기 위해 공연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팬들에 관해 그는 부사 ‘더’를 다수 사용했다. ‘더’는 과거 AJ와 현재 시윤을 구분하는 경계선이었다. “팬 분들에게 더 발전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 마음이 커요. 더 나은 아티스트가 되고 싶고요. 더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습니다. 이전에는 못 보여드렸으니까요.”
가수 생활 14년 차의 시윤은 “나만의 나”였던 적이 없다고 고백했다. 불행했을까. 그는 인터뷰에서 불행 혹은 불운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이야기 중간 고개를 젓거나 한숨을 내쉬는 모습에서 기자는 어떤 음성어보다 강한 무언의 아쉬움을 느꼈다. 꿈이 없는 삶은 죽은 삶이라고 단언하는 가수는 꿈을 펼칠 준비를 마쳤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이제는 흰 종이 위에 윤곽을 그렸다. 정체성 혼란을 끝낸 시윤은 ‘시윤만의 시윤’으로 노래하고자 한다. 공감이 공명할 그날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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