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재 기자 / 백수연 기자] “나에게 맞는 것을 찾아가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산다라박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역시 가수라는 직업이다. KBS2 ‘인간극장’을 통해 ‘필리핀의 보아’로 대중에게 각인 됐을 때도, 2009년 투애니원(2NE1)의 서브 보컬이자 랩 담당 멤버로 데뷔했을 때도 그의 주위에는 무대와 조명 그리고 주황색 마이크가 자리잡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산다라박은 투애니원의 꽃으로 영원할 줄 알았다.
그러나 2016년 11월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 가요계의 한 획을 그었던 투애니원이 해체된 것이다. 멤버들은 미국 진출 등 각자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 홀로서기를 시작했고, 그것은 산다라박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필리핀에서의 솔로 활동은 어언 약 13년 전의 일. 이와 관련 그는 “정말 큰 변화였다”며 천천히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오늘 같은 인터뷰도 전에는 투애니원 네 명이 같이 왔지만, 이제는 혼자 오게 됐다. 상당히 큰 부담이 될 수 밖에 없고, 이런 점들이 정말 사소한 부분마다 느껴지더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너무 외로웠고, 쓸쓸했다. 항상 리더이자 동생인 씨엘(CL) 뒤에 숨어서 뭔가 해주길 기다렸는데, 이제는 무엇이든 혼자 해나가야 한다는 점이 두려웠다.”
“하지만 요즘은 씩씩해졌다. 사실 어느 순간 ‘그냥 변화하는 단계다’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할머니 될 때까지 팀을 유지할 순 없는 것 아닌가. 다가올 일이었고, 끝은 아니라고 생각 중이다. 요즘 많은 선배님들이 재결합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투애니원의 미래도 그러하길 기다리고 있다. 이제는 나에게 맞는 것을 찾아가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다가올 미래였기에 그것을 받아들였을 뿐이라고 이야기하는 산다라박. 어쩌면 어떤 현실주의자의 비관으로도 들릴 수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만의 발랄하고 희망찬 목소리와 어우러진 대답은 오히려 정반대의 인상을 전달했다. 희망을 버리고 단념하는 자포자기 식의 체념 대신 상황이 옳다고 인정하며 미래를 기약하는 수긍은 취재진도 그를 응원케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 자신에게 맞는 것을 찾아가는 과정에 놓인 산다라박이 음악 아닌, 어쩌면 대중에게 생소할 수 있는 연기(演技)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만났던 한 작품이 4월6일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 ‘원스텝(감독 전재홍)’이다.
과거를 잃은 채 색청을 앓고 있는 여자와 악상이 떠오르진 않지만 여전히 음악을 사랑하는 남자의 감성 뮤직 드라마인 이번 영화에서 산다라박은 사고로 모든 기억이 사라진 시현 역을 맡았다. 더불어 그는 24년 차 배우 한재석과 멜로 아닌 남녀간의 우정을 스크린 위에 그려냈다. 예상 외로 어울리는 둘의 앙상블은 러닝 타임 내내 영화의 기둥으로 작용한다.
“(한)재석 선배님이 워낙 대 선배님 아닌가. 조각 같은 외모 때문에 ‘성격이 차가우시면 어떡하지?’라는 고민도 했는데, 촬영장에서의 선배님은 정말 따뜻한 분이셨다. 현장의 분위기를 띄우는 것도 선배님의 힘이 컸다. 아무래도 후배들은 조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데, 오히려 선배님이 먼저 농담도 해주시고 촬영 전 대사도 맞춰주시니까 감사한 마음이었다.”
결국 영화는 사람이 빚어내는 결과물이다. 작품 외적으로 배우 사이의 연결 고리가 약했다면, 시현을 치유하고픈 지일(한재석)의 도움은 관객에게 와닿지 않았을 터. 하지만 두 사람은 친밀감을 극중에도 이입시키며 몰입을 이끌어냈다. 이와 관련 시현의 치유란 색청의 치료로, 색청이란 음을 들으면 그것에 수반되는 색채적 직관이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시현이 앓고 있는 색청은 희귀한 병이기 때문에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레퍼런스 또한 당연히 없더라. 그렇기에 전재홍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런 세계일 것이고, 저런 모양이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끊임없이 했다. 상상으로만 연기를 펼치는 것이 최선이었다. 영화에서는 CG로 표현됐는데, 아마 그것과 유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산다라박의 입에서 나오는 연기라는 두 음절의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마냥 낯설 수도 있지만, 사실 그의 연기는 꽤 오랜 시간 전부터 대중에게 호흡을 내뿜었다. ‘샌디(Sandy)’라는 애칭으로 사랑받았던 필리핀 활동 시절을 제외한다면, 지난 2009년 방영됐던 MBC ‘돌아온 일지매’로 시작된 산다라박 연기 인생은 어느새 9년 차에 접어든 셈.
물론 꾸준하지 않은 일시적 활동이었기에 숫자를 더하고 빼는 계산만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경력이다. 그러나 2015년부터 ‘닥터 이안’을 비롯한 여러 웹 드라마들과 MBC ‘한번 더 해피엔딩’에 이름을 올린 이상 산다라박은 관록의 가수면서 동시에 신인 배우인 만능 엔터테이너다. 하지만 여기 신인이라면 겪어야 할 난관이 있다. 바로 연기 혹평이다.
“대중의 혹평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이미 그런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알고 있다. 나라는 사람은 꾸준한 노력을 통해 변화된 모습을 보여드리는 편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영화는 산다라박의 첫 시작이다. 혹평이나 여러가지 말씀들을 잘 받아들이며 차근차근 해나가고 싶다. 목소리 톤이나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잘 살리고 싶다.”
산다라박은 목소리 톤을 자신의 특징으로 꼽았다. 물론 그의 목소리는 투애니원 시절 ‘야자수 머리’와 함께 산다라박의 시그니처로, 특유의 음색은 듣는 이의 마음을 희망차게 돕는다. 그러나 연기만큼은 물음표다. 실례로 그는 한 인터뷰에서 판검사 역할을 하고 싶지만 주위에서 목소리를 이유로 부정적 의사를 표시했다고 밝혔던 바 있다.
“목소리 톤은 노래할 때도 듣던 지적이었다. 슬픈 노래를 부르는데도 ‘너무 행복해 보인다’라는 말씀을 하시더라. 이번 ‘원스텝’도 슬픈 내용이 주를 이루니까 목소리가 튀는 것을 걱정했다. 하지만 타고난 톤을 바꿀 순 없기 때문에 이것을 단점 대신 장점으로 만들기 위한 고민을 거듭 중이다. 저음 연습도 해봤다. 어쩔 수 없더라.”
연예인을 향한 대중의 시선 일부에는 부러움이 존재한다. 좋은 옷만 입고, 예쁘게 화장하고, 핀 조명 아래 공연하는 말 그대로 스타 아닌가. 하지만 목소리마저 기호를 따라야 하는 산다라박의 고민에서 드러나듯 어쩌면 스타는 극한 직업이다. 이 가운데 과연 그는 어떤 방식으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지 궁금해졌고, 불현듯 “고양이”란 대답이 나왔다.
“쇼핑과 고양이로 힐링한다. 특히, 힘들고 울고 싶을 때 고양이들을 보면 자연스럽게 힐링이 된다. 예전에는 이해 못 했지만 키우고 나니까 알겠더라. 비염 때문에 고생하면서도 열심히 키우는 중이다. 어느새 징크스도 생겼다. 집 밖으로 나오기 전에 꼭 한 마리, 한 마리 눈 마주치면서 ‘오늘도 잘하고 올게’라며 모두에게 다짐을 건넨다.”
인터뷰를 마치며 산다라박은 배우의 길을 걸으면서도, 동시에 가수의 모습을 소원했다. 몇몇 아이돌 출신 배우들은 연기를 노래의 상위 개념으로 생각하는 듯 더 이상의 가수 활동을 거부하는 모양새로 팬들의 눈쌀을 지푸리게 만들었지만, 산다라박은 달랐다. 시작과는 너무 먼 곳까지 흘러왔음에도 본류(本流)를 잊지 않는 모습이 취재진을 감동시켰다.
“개인적인 바람은 많은 분들이 그리워하시는 만큼 가수로서의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은데, 아무래도 차기작인 영화 ‘치즈 인 더 트랩’ 때문에 하반기를 기약해야 될 것 같다. 가수 산다라박으로서 대중에게 다시 인사드리고 싶은 마음이 크다.”
2009년의 일이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빅뱅과 투애니원의 컬래버레이션과 ‘아이 돈 케어(I Don’t Care)’의 흥행. 투애니원은 최고였으며, 산다라박은 그 인기의 중심이었다. 그리고 ’원스텝’에서 산다라박이 연기했던 시현은 “만들어진 이미지로 살아가는 것은 싫다”며 지일이 건네는 ‘메가 히트곡’의 기회를 거부한다. 아주 묘한 인연이다.
산다라박의 투애니원 시절을 ‘만들어진 이미지’로 격하시키는 것도, ‘메가 히트곡’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도 아니다. 연습생 시절을 겪어냈고, 신인 시절을 이겨냈고, 스타 시절을 감아냈던 그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아마 음악이 가지는 양면성 중 외적 가치를 온 몸으로 받아냈던 그였기에, 치유라는 내적 가치도 소화해내지 않았을까. 그것도 훌륭히.
산다라박은 “(엄)정화 언니를 정말 좋아한다. 영화에서는 배우로, 무대에서는 가수로. 그런 모습들이 존경스럽다”며, “연기와 무대를 모두 완벽하게 꾸밀 수 있는 모습을 기다리고 있다”고 엄정화를 롤 모델로 꼽았다. 아직은 ‘연기 신생아’인 그에게는 무리일 수도 있는 장래 희망. 하지만 그는 해낼 것이다. 다음의 단락이 그것을 증명한다.
“지금은 어떤 배우가 되고 싶은지 이야기하는 것보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잘 알고, 더불어 잘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늘려가는 배우가 되고 싶다. 그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할 수 있는 일들에 최선을 다하고 싶다.”
한편 영화 ‘원스텝’은 전국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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