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3월, 스위스 제네바모터쇼에 파격적인 슈퍼 스포츠카 한 대가 등장했다. 파가니(Pagani)자동차의 존다(Zonda) C12였다. 메르세데스 AMG가 공급한 V12 엔진으로 최고 394마력을 발휘했으며, 정지 상태에서 시속 96㎞까지 4.2초에 주파했다. 1992년 파가니자동차가 설립된 후 7년 만에 실차가 세상에 등장해 화제를 모았다.
파가니자동차를 설립한 인물은 1955년 아르헨티나 태생인 호라치오 파가니(Horacio Pagani)다. 그는 당시 전설적인 F1 드라이버 출신으로 아르헨티나 메르세데스 AMG 명예 사장이었던 후안 마뉴엘 판지오의 눈에 띠었고, 재능을 인정받아 판지오의 소개로 1983년 이태리로 옮겨 직접 F3 레이서로 활동했다. 이 때 경주차를 디자인하는 능력도 드러냈다. 이후 그는 탄소복합소재를 활용한 섀시 전문가로 람보르기니에서 일을 했지만 100% 탄소섬유로 가야 한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독립을 선언해 1992년 파가니자동차를 설립했다. 페라리 창업자인 엔초 페라리 제품에 불만을 가진 페루초 람보르기니가 직접 람보르기니자동차를 만든 것처럼 파가니 또한 람보르기니를 떠나 파가니자동차를 만든 셈이다.
그런데 그의 첫 번째 제품인 '존다(Zonda)'의 원래 아르헨티나 멘도사 지방에 부는 봄철 바람의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존다'로 작명되기 전 차명은 '판지오 F1'이었다. 파가니의 능력을 알아봐준 인물이 바로 판지오였고, 덕분에 이태리 람보르기니에서 슈퍼카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익힐 수 있었기 때문이다. 파가니는 판지오의 도움과 배려를 잊지 않았고, 그의 이름을 차명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게다가 1911년생이 판지오는 F1 초창기 월드 챔피언을 5회나 거머쥐었을 만큼 전설이 드라이버이기도 했다. 나아가 1992년 파가니자동차 설립 이후 엔진을 고민하던 그에게 메르세데스 AMG 공급이 이뤄지도록 도움을 준 인물도 판지오였다.
하지만 1995년 판지오가 세상을 떠나자 차명은 '존다'로 바뀌게 된다. 살아 있는 전설을 기리려 했던 파가니의 계획에 차질이 생겼던 탓이다. 그럼에도 메르세데스 AMG 엔진은 차질 없이 공급됐고, 파가니는 이후 존다의 스페셜 버전인 몬자(Monza)와 존다 후속 차종인 '와이라(Huayra)'에도 AMG 엔진을 사용하고 있다. 파가니에게 메르세데스 AMG 엔진 사용은 판지오에 대한 그의 추모이자 배려인 셈이다.
파가니 제품에 탑재되는 메르세데스 AMG 엔진은 단 한 명의 장인이 모두 수작업으로 만들고,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독특한 방식이다. 오로지 파가니 엔진만을 위한 독자적인 작업 방식인 만큼 메르세데스 AMG 엔진 성능을 드러내기 위해 파가니가 완성차를 만든다는 해석도 있을 정도다. 파가니로선 자신을 키워주고 최고의 전문가가 되도록 만들어 준 은인에 대한 보답, 그게 바로 메르세데스 AMG 엔진 사용이었던 것이다.
권용주 기자 soo4195@autotime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