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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비운의 삶 묻고 잠든 황실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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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양주시 홍유릉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는 조선과 대한제국으로 이어지는 구한말, 그 격랑의 시대를 산 마지막 황실 인물들이 잠들어 있다. 홍유릉이다.

 홍릉(洪陵)은 조선왕조 26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 씨의 능이고, 유릉(裕陵)은 27대 순종황제와 원비 순명효 황후 민 씨 및 계비 순정효 황후 윤 씨를 모신 능이다. 그리고 능역 안에는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 영왕(영친왕)과 영왕비 이방자 여사를 모신 ‘영원’, 고종황제의 고명딸이며 비운의 공주로 잘 알려진 ‘덕혜옹주 묘’, 순종황제의 이복동생인 의왕(의친왕) ‘이강 묘’ 등이 있다.






 조선을 넘보는 열강들의 야욕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였던 구한말의 역사를 떠올리면 말할 수 없는 회한과 참담함이 몰려오듯, 그 격랑 속에서 비운의 삶을 살았던 마지막 황실 사람들이 잠든 홍유릉을 찾으면 여느 왕릉 순례와 다른, 회한과 비감함이 물밀듯 밀려온다.
 
 홍유릉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쉽게 갈 수 있다. 일반인의 관람이 가능한 곳은 홍릉과 유릉 두 곳이고, 다른 곳은 기신제(제사)같이 특별한 행사 때만 참배할 수 있다. 한 때 소설 <덕혜옹주>가 베스트셀러로 떠올랐을 때 이 곳으로 덕혜옹주 묘를 참배하러 온 이들이 많았으나 발길을 돌려야 했다.

 홍유릉 입구 맞은 편에는 홍릉 유릉 역사문화관이 있다. 조선 왕릉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과  홍유릉의 특징, 대한제국 황실 가계도 등도 사진과 도표로 상세하게 전시됐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이 곳에 들러 능역을 참배하면 여러 사실들이 새롭게 보인다. 소설이나 드라마보다 더 극적인 대한제국 마지막 황실 이야기가 오래도록 발길을 잡는다.  






 능역으로 들어서면 왼쪽으로 홍릉, 오른쪽에 유릉이 있다. 먼저 홍릉으로 향한다. 숲이 우거진 관람로를 따라가면 작은 연못이 나타난다. 여름에는 연꽃이 가득 못을 메웠을  터이나 지금은 썰렁한 모습이다. 둥근 연못 안에 둥근 섬이 자리하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연못을 지나 조금 더 걸어가면 왼쪽으로 어재실, 오른쪽으로 홍살문이 나온다. 홍살문 너머로 보이는 능역의 모습은 이전에 보던 조선왕릉과 다른 분위기가 느껴진다. 이는 왕릉이 아니라 황제릉이기 때문이다. 조선은 1897년 국호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 왕을 황제라 칭함에 따라 왕릉도 명나라 황제릉을 본받아 능제를 삼고 능역을 다듬었다.






 능침의 삼계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 대신 일자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다. 능침 주위에 배치됐던 석수들은 배전 앞, 참도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해 나란히 세워져 있다. 능침은 병풍석으로 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고 혼유석 1좌, 그 양 옆으로 망주석 1쌍을 세우고 그 앞으로 사각장명등을 설치했다. 석물의 배치는 홍전문과 배전 사이에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 말의 순으로 대칭돼 있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두 단으로 구분돼 있던 기존의 것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 옆이 한 단 낮은 삼단이다.






 고종은 1852년(철종 3년) 흥선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왕위결정권을 쥐고 있던 신정왕후 조 씨가 고종을 양자로 삼아 왕위에 오르게 했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을 하고, 흥선군을 흥선대원군으로 높여 국정을 총람케 했다.

 흥선대원군은 순종·헌종·철종으로 이어지는 60여 년간 안동 김 씨의 세도정치에 신물을 내고, 이를 근절시키기 위해 여덟 살에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란 민치록의 딸을 왕비로 책봉한다. 바로 명성황후 민 씨다. 그러나 비극의 역사는 그 때 이미 잉태되고 있었다.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며느리 민 씨와의 갈등과 대립에 더해 일본과 서구 열강들이 물밀듯이 밀려들어오며 혼란을 더했다.

 1882년 임오군란, 미·영·독과의 통상조약 체결, 1884년 갑신정변에 이어 1894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임오군란 이후 명성왕후는 친청·친로정책을 통해 정치적 기반을 다지려 했다. 하지만 이러한 외교정책에 불만을 품은 일본공사가 보낸 자객에 의해 1895년 8월20일 처소인 옥호루에서 처참하게 살해됐다.






 고종의 재위 44년간은 외세의 침입이 잇달았던 격동기로, 고종은 이를 막아내고자 노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1919년 1월21일 춘추 67세로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장례일인 3월1일을 기해 전국에 독립운동이 일어났음은 너무도 유명하다.






 홍릉은 고종황제와 명성황후 민 씨의 합장능이다. 고종은 명성황후가 1895년 을미사변으로 세상을 뜨자 처음에 그 능을 동구릉 안에 조성하려 했으나 국내외의 여러 복잡한 사정으로 그러지 못했다. 1897년 10월 명성황후를 대한제국의 황후로 높이고, 같은 해 11월 능 이름을 홍릉으로 새로 정해 서울시 청량리에 모시게 됐다.

 그런데 청량리 홍릉은 조성 직후부터 석물에 문제가 발생했고, 1900년부터 풍수 상의 문제로 능을 옮기자는 의견이 분분했다. 이에 고종은 경기도 남양주 금곡지역을 새 능역으로 정해 황제국의 위상에 걸맞은 능제를 마련하고자 했다. 이후 1901년 침전을 완성했고, 1904년까지 주요 석물을 마련했다. 금곡 홍릉은 고종 생전에 완성하지 못하다가 1919년 고종 승하 후 명성황후와 합장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이준애(여행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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