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혜영 기자 / 사진 정영란 기자] 이보다 더 착한 남자가 있을까?
KBS '직장의 신'(극본 윤난중, 연출 전창근 노상훈)에서 이희준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 '무정한' 역을 맡았다. 입사 동기 친구가 자신을 누르고 더 높은 직급에 올랐어도 질투 하나 없고 좋아하는 것도 아닌데 여직원을 위해 가방을 고쳐서 집까지 가져다주는 섬세함이라니 그를 보고 많은 여성들은 설렘을 느꼈다.
최근 강남구 신사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이희준(36)은 여러 질문에 허허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지만 뜻밖에 무정한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캐릭터에서 완벽히 빠져나온 모습이었다.
"적당할 때 끝난 것 같아요. 이 얘기는 더 길어져도 안 좋은 것 같아요. 미스김의 계약이 끝나고 다들 헤어진 후 언젠가 '3개월간 함께 일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얘기하고 추억 속에 남는 아련함이 남아야 되는데 그 이후에 누가 사귀거나 결혼하면 극이 깨질 거 같아요. 시즌 2는 이 배우들하고 같이 한다면 한 번 더 해보고 싶어요."
'직장의 신'은 '구가의 서'에 밀려 2위로 극을 마무리했지만 정규직과 계약직 등 대다수의 '현실적'인 삶을 다뤄서인지 체감 인기는 그 이상이었다.
"넥타이 매고 정장을 입고 같은 시간에 매일 출근해서 책상에 앉아 '점심 뭐 먹을까요?', '맛있는 거 드세요', '내일 봐요' 그런 일상들을 간접적으로 경험해봤는데 직장인들 정말 존경스러운 것 같아요. 공무원인 제 친구는 '쳇바퀴 같은 일상을 재밌게 담아줘서 고맙다'고 문자도 왔어요. 그럴 때 '의미 있는 작업이구나' 생각을 하죠."
특히 일자 머리에 순박한 웃음을 지으며 '배려의 아이콘'으로 등극한 무정한은 납득이 안 갈 정도로 극한의 배려를 보여줬다. 하지만 착해도 너무 착해 다소 비현실적인 캐릭터라는 말도 나왔다.
이에 대해 이희준은 "대본을 받자마자 식품회사에 다니는 친한 친구에게 전화를 해서 물어봤다"면서 "실제로 이런 팀장이 있다더라. 이렇게까지 드라마적으로 배려심이 깊지는 않겠지만 손해 보면서도 긍정적이려고 하고 웃으려고 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이어 "또 내 주변에도 자기 손해 보면서 늘 배려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쓰는 말 중에 '살짝이'가 있었다. '이거 살짝이 도와줄 수 있어?' 이런 식으로 상대방이 불편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단어를 쓰는 거다. 그 말은 대본에는 없던 건데 그 친구를 보고 넣었다"고 설명했다.
평소 관찰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해 '해피투게더3'에서 실감 나는 표범 연기를 선보였던 그는 무정한 역시 지인 등 자신이 직접 본 사람들을 바탕에 두고 연기하며 캐릭터를 더 확고히 만들어나갔다. 그 결과 어느새 이희준은 무정한 그 자체가 돼 있었다.
"그 대사하면서 되게 슬펐어요. 정주리(정유미)가 잘릴 위기에서 미스김이 도와줬을 때 '나는 결국 아무것도 못했네요. 앞으로도 이런 일이 있을 때 아무것도 못하겠죠'라고 하는데 가슴 깊이 와 닿더라고요. 이런 성격의 사람이 이런 말을 내뱉을 때는 얼마나 자조적이고 슬플까 생각이 들었죠."
분명 어딘가에는 이런 사람도 있겠지만 사실 이런 사람은 정말 드물다. 미스김(김혜수)에게 고백하자마자 차여도 바로 포기할 정도니 말 다했다. 이희준 역시 무정한의 그런 점은 "조금은 답답했다"면서 "나라면 어떻게 해서든 쟁취할 것 같다"고 밝혔다.
하지만 의외로 시청자들은 '모태솔로'로 나오는 무정한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했다. 미스김은 좋아하는 사람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정주리에게는 여러 행동들이 남달랐다. 대부분의 여자라면 '저 사람이 날 좋아하는 게 아닐까' 의심의 여지가 충분해 보였다.
"남녀의 느낌이 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회사 후배를 챙겨주려는 걸로 가야지 무정한이 그렇게 느껴버리면 정말 바람둥이가 돼 버린다"고 해명한 그는 '러브라인에 아쉬움이 없느냐'는 질문에는 "멜로에 대한 아쉬움도 없다. 정유미가 '우리 둘이 붙는 신이 있었으면 더 재밌을 거 같은데'라고 하길래 '어설프게 하지 말고 제대로 하자'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직장의 신'은 특히나 현장 분위기가 좋았다. 카카오톡 단체 채팅방부터 시작해 MT, 뮤지컬 관람까지 이들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이렇게 매번 좋은 배우들을 만나다니 제가 참 운이 좋은가 봐요. 아무도 자기 고집을 부리거나 악하게 행동한 사람이 없었어요. 그래서 앞이 두려워요. 정말 죽도록 싫은 파트너를 만날 수도 있으니까요. 그게 제 과제인 거 같아요. 싫은 파트너를 만나더라도 좋은 사람들처럼 똑같이 배려해야겠죠?"
이희준은 선역과 악역, 사극과 현대극, 연극에서 브라운관, 스크린까지 참으로 다양한 곳에서 활약해왔다. 그는 작품 선택의 기준으로 "'함께 하는 사람들'이 가장 중요하다"면서 이번 '직장의 신'에서 만난 배우들에게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드라마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김혜수에 대해서 이희준은 "(김혜수 선배님이) 매일 만나고 매신 찍을 때마다 칭찬해주셨다"라며 "평소에도 '희준 씨 이런 거 너무 좋아'라고 하시고 연기할 때도 '컷'하면 '지금 연기 너무 좋은 거 같아. 감독님~ 연기 너무 좋죠?'라며 한참 후배인 저를 항상 북돋아 주셨다. 꼭 닮고 싶은 점이고 후배한테 그렇게 하려고 한다"고 전했다.
장규직 역을 맡은 오지호에게는 "배려심이 많은 선배다"라면서 "나보다 TV 경험이 훨씬 많고 편집 포인트도 잘 아시다 보니 나한테 많이 얘기해줬다. '이럴 땐 편집상 이렇게 하는 게 좋다', '이건 잘 안 보인다' 등의 노하우를 많이 알려주셨다. 상대가 싫으면 얘기하기도 쉽지 않은데 감사했다"고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직장의 신'을 통해 처음으로 정극연기를 선보인 2AM 조권에게도 칭찬이 이어졌다. "권이한테 아이디어를 주면 정말 자기 아이디어인 것처럼 태연하게 해낸다. 성격도 좋고 정말 센스가 넘친다"고 운을 뗀 그는 "쫑파티 때 '정식으로 배우를 한 게 아니라서 더 까불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역할이 아니어서 스스로 절제하는 모습을 보여줬는데 배우로서 너무 좋은 점'이라고 칭찬해줬다"고 밝혔다.
우연한 기회에 연기를 시작한 이희준. 무명 시기가 꽤 길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쉴 틈 없이 일했던 그는 소박한 듯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었다.
"인기보다는 좋은 작품에서 좋은 연기를 하고 싶은 욕심이 더 컸고 레드카펫을 밟고 환호성을 받아야겠다는 게 제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그런 건 아직도 쑥스러워요. 그리고 전 '각자 꽃이 피는 시기가 다 다르다'는 말을 좋아하거든요. 제 꽃이 피는 시기가 있다고 믿고 아직도 피지 않았다고 생각해요. 꽃 몽우리가 맺히기도 전이고 이제 막 싹이 나는 것 같아요."
'천의 얼굴을 가진 배우'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철저히 '연기력'으로 인정받은 이희준이었지만 그는 "난 약점 밖에 없다"며 겸손함을 보였고 '다들 연기 잘한다고 하지 않느냐'는 말에는 "왜 그런 거죠?"라고 오히려 되물었다.
"저는 정말 재능이 없고 99.9% 노력파에요. 그렇게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서 동시대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역할이나 작품에 따라서 마음을 울리기도 하고 화나게도 하고 그렇게 마음에 공명을 일으키는 배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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