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 없는 '관리 사각지대'
美·日선 소비자 보호장치 마련
신원 확인하고 거래기록 보유
[ 김순신 기자 ] 1999년 상품권법이 폐지된 이후 국내 상품권 시장은 관리감독 사각지대로 방치돼 있다. 11조원이 넘는 시장으로 성장하면서 각종 폐해가 양산되고 있지만 이를 통제하는 규제 법안은 물론 주무부처도 없다.
한국조폐공사와 통계청에 따르면 국내에서 유통되는 상품권 종류는 백화점·구두·주유·외식·관광·도서·문화상품권 등 200여 종이 넘는다. 지난해 국내에서 발행된 상품권(종이와 모바일 포함)은 11조7087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문화상품권 등 조폐공사를 통하지 않고 발행되는 상품권까지 포함하면 한 해 발행 규모는 12조원이 넘을 것이란 게 금융업계 추산이다.
국내 기업들은 인지세만 내면 상품권을 무제한 발행할 수 있다. 인지세는 상품권 액면 가격에 따라 1만원권은 50원, 1만원 초과~5만원 이하는 200원, 5만원 초과~10만원 이하 400원, 10만원권 초과는 800원 수준이다. 특히 모바일 상품권은 인지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내년부터 3만원 이상인 경우에만 부과된다.
기업들이 상품권을 구입할 때도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는다. 1999년 상품권법이 폐지되면서 규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법이 폐지되기 전에는 정부가 연간 발행 규모를 통제했고, 발행 기업은 판매 내역을 보관했다가 정부가 요청하면 제출해야 했다. 현재 백화점 등은 상품권 판매 기록을 보존하지 않고 있다. 사실상 유통 경로를 추적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에 범죄자들의 자금 세탁 경로로 자주 활용된다.
법인카드로 상품권 구매가 가능해진 2002년부터는 이른바 ‘상품권 깡’(액면가 보다 낮은 금액의 현금으로 교환해 유통하는 행위)을 통해 조성된 비자금 사건들이 줄을 이었다. 상품권은 중개업소나 신세계가 운영하는 SSG페이앱(응용프로그램) 등에서 5% 정도의 수수료를 물면 현금으로 바꿀 수 있다. 상품권을 대량으로 구매할 경우 백화점 등 발행처에선 0.5~2%가량의 추가 상품권을 준다. 한 기업 관계자는 “상품권을 접대비나 복리후생비로 장부 처리한 뒤 거액으로 구매하면 장부에 기록되지 않는 추가 상품권이 생긴다”며 “상품권 깡을 통해 현금으로 바꿔 사용한다”고 귀띔했다.
국내와 달리 미국, 일본 등 주요 국가들은 상품권을 엄격하게 규제하고 있다. 이들 국가는 법령을 통해 상품권에 대한 정의를 규정하고, 유효기간 설정 금지와 잔액 환급 등 소비자 보호장치를 마련해 놓고 있다. 상품권 발행업체 부도로 인한 소비자 피해를 막기 위해 공탁금 조항과 우선변제권 등 안전장치도 걸어 놓고 있다.
미국은 상품권의 유효기간 설정을 금지했다. 발행처는 ‘자금 세탁 방지 규정’에 따라 구입자 신원을 확인하고 거래 기록을 보유해야 한다. 일본에선 상품권을 발행하려면 재무상에게 신고해야 하고, 발행 업무에 대한 보고서도 주기적으로 제출해야 한다. 미사용 잔액이 일정액을 초과하는 경우 50%에 해당하는 발행보증금을 공탁해야 하고, 다른 채권에 우선 변제해야 한다는 소비자 보호 조항도 두고 있다. 상품권 발행 업체의 파산과 부도를 대비해 안전장치가 명확하게 법제화돼 있는 셈이다. 김상봉 한성대 교수는 “상품권 발행 기업이 자금난에 처하면 상품권을 대규모로 발행해 자금 조달에 나설 가능성도 있다”며 “상품권 자체가 일종의 채권인 만큼 정부 기관에서 체계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순신 기자 soonsin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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