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공조·반도체 수출제한 검토
靑 NSC "외교적 대응방안 마련"
[ 오상헌/서민준/구은서 기자 ]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사진)은 4일 일본의 반도체 소재 수출 규제와 관련해 “강제징용의 사법 판단에 대해 경제적으로 보복한 조치라고 명백히 판단한다”며 “규제를 철회하지 않으면 상응조치를 반드시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정부가 검토하는 ‘맞보복’에는 한국이 세계 시장의 73%를 장악하고 있는 D램 반도체의 일본 수출을 제한하는 방안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홍 부총리는 이날 CBS 라디오에 출연해 “일본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기 위해 내부 검토 중”이라며 “국제법과 국내법상 할 수 있는 상응조치도 강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일본에 타격을 줄 수 있는 수출 규제나 경제 조치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청와대도 이날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열어 “보복적 성격의 수출 규제 조치는 WTO 규범 등 국제법을 명백히 위반한 것으로 일본이 이런 조치를 철회하도록 외교적 대응 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는 보복 카드로 △국제공조 강화 △WTO 제소 △반도체 등의 일본 수출 제한을 비롯한 단계별 대응전략을 마련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선 한국산 반도체와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패널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자국 기업들도 큰 타격을 받는 미국(구글 애플 아마존) 중국(샤오미 오포 비보) 등과 손잡고 일본을 압박하기로 했다.
외교해법 미룬 채 '맞보복' 칼 빼나…한·일 전면戰 땐 기업만 타격
일본이 한국의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을 겨냥한 수출 규제를 4일 강행하면서 ‘설마’ 했던 양국 간 무역분쟁이 현실이 됐다. 규제 대상은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포토 레지스트(감광액)’와 ‘에칭가스(고순도 불화수소)’, 스마트폰 등 유기이엘(EL) 디스플레이 등에 쓰이는 ‘플루오린 폴리이미드’다. 지금까지는 사실상 별도 심사 없이 이들 제품을 수입할 수 있었으나 앞으로는 건건이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 허가엔 90일가량이 걸린다. 일본은 심사 과정에서 갖가지 트집을 잡아 한국 수출을 불허할 가능성이 높다. 이럴 경우 D램 반도체,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패널 등의 생산에 중대한 차질이 빚어진다.
우리 정부도 대응 수위를 대폭 높였다. 청와대는 이날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 회의에서 “보복적 성격의 수출 규제 조치는 세계무역기구(WTO) 규범 등 국제법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라고 규정하고 “조치를 철회시키기 위한 외교적 대응 방안을 적극 강구하겠다”고 밝혔다. 그동안 직접적 대응을 자제했던 청와대가 첫 공식 입장을 내고 ‘단호한 대응’ 의지를 밝힌 것으로 분석된다. 청와대는 전날까지만 해도 “국가 간 문제라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럽다”며 직접적인 대응을 자제했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더 나아가 ‘맞보복’까지 언급했다. 홍 부총리는 이날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일본이 규제를 철회하지 않으면 일본 수출 규제 등 상응한 조치를 반드시 마련하겠다”고 말했다.
WTO 제소만으로는 대응 역부족
정부가 수출 규제 맞불도 불사하겠다고 나선 이유는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만으로는 상황을 반전시키는 데 역부족이라는 판단이 섰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일본의 수출 규제가 본격화하면 삼성전자 등이 확보한 재고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최대 4개월로 알려졌다. WTO에 제소해 판정을 받는 데는 최소 2~3년이 걸린다. WTO 판정을 기다리는 사이 D램 반도체와 OLED 패널 생산 등이 급감해 산업 기반이 초토화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더구나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는 한국 수출의 25%를 책임지는 주력산업이다. 이들 산업이 휘청거리면 경제 전체가 심각한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다.
한국 정부는 급박한 상황을 감안해 일본에 양자 협의를 요청했지만 일본은 그마저 무대응으로 일관하고 있다.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은 “일본이 책임 있는 전략물자 국제 수출 통제의 당사국이라면 우리가 제안한 양자 협의에 응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반도체 수출 규제’로 맞불 놓을 가능성
한국이 일본에 꺼낼 수출 규제 맞불 카드로는 D램 반도체와 OLED 패널 등이 거론된다.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는 군사용 등으로도 쓰인다는 점에서 전략물자처럼 국가가 수출을 통제할 근거조항이 있다”며 “일본이 에칭가스 등을 전략물자라는 이유로 수출을 통제한 것처럼 정부도 여차하면 ‘반도체 일본 수출 제한’ 카드를 꺼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기업이 각각 세계시장의 73%와 50%를 차지하고 있는 D램과 낸드플래시는 전자, 자동차 등 거의 모든 산업에 필수부품으로 들어가는 만큼 수출을 제한하면 일본 기업도 상당한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다만 정부는 수출 규제 맞불 카드는 최후의 수단으로 아껴 놓을 계획이다. 정부 관계자는 “전략물자 수출 규제는 안보에 명백한 위협이 된다는 점을 입증해야 하는데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이런 점 때문에 정부는 당장은 국제 공조와 WTO 제소 등으로 대응할 방침이다. 한국 반도체·디스플레이 생산에 차질이 생기면 덩달아 타격을 받는 미국 애플, 중국 화웨이 등과 함께 일본을 압박한다는 전략이다. 아울러 에칭가스 등 수출 규제에서 일본이 안보에 위협이 된다는 증거도 없이 한국에 판매를 안 하는 사례들을 최대한 수집할 계획이다.
정부가 ‘일본의 공세에 당당하게 맞서겠다’는 결기를 보여준 것은 평가할 만하나 양국의 갈등이 경제전쟁으로 치달으면 결국 기업들만 희생양이 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장은 “한국과 일본이 전면적인 경제전쟁으로 가면 양국 기업과 소비자만 막대한 피해를 볼 것”이라고 우려했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 모든 사태는 정부의 외교 실패인데 왜 외교로 풀 생각은 안 하고 경제적 대응만 앞세우느냐”고 비판했다.
오상헌/서민준/구은서 기자 ohyea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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