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덩치 커진 버스, 줄어드는 이용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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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용 기자 ] 1827년 증기 보일러로 특허를 받은 월터 핸콕이 1829년 ‘인펀트’로 명명된 10인승 대형 증기 이동수단을 내놓은 이유는 위험한 다인승 마차의 대안 역할이 목적이었다. 그 결과 1831년 영국 런던 외곽의 스트라트포드와 런던 중심가를 오가는 운송 수단으로 인펀트가 활용됐다. 자주 전복되는 마차보다 안전했고 속도도 빨랐다. 말이 이끄는 것보다 비용이 적었고 넓은 타이어는 도로 손상을 최소화했다.

1832년에는 런던에서 76㎞가량 떨어진 해안가 도시 브라이턴까지 오가는 대형 증기 이동 수단으로 인펀트가 투입됐다. 당시 마차보다 월등히 적은 이동 비용이 산출된 이유는 영하의 추운 날씨에는 이동이 쉽지 않았던 말과 달리 증기기관은 전천후였기 때문이다.

1833년 4월 핸콕은 인펀트보다 큰 이동 수단에 ‘디 엔터프라이즈’라는 이름을 붙여 사업을 확장했다. 엔터프라이즈는 런던에서 이즐링턴을 거쳐 패딩턴까지 오가는 역할을 맡았다. 최초의 일정 노선이 확정된 증기기관 이동 서비스였던 셈이다.

엔터프라이즈에는 여러 측면에서 현재도 적용되는 혁신기술이 담겼다. 리프 스프링 방식의 서스펜션은 지금도 대형차에 적용될 만큼 승차감의 혁신을 가져온 것으로 꼽힌다. 이용자가 폭증해 공간이 부족해지자 핸콕은 1836년 탑승 정원을 22명까지 늘린 이동 수단에 ‘오토메이션’이라는 이름을 붙여 런던과 패딩턴 사이를 오가기 시작했다. 인기를 끌어 왕복 횟수만 700회에 달했다. 무어게이트에서 스트라트포드까지 시간당 15마일의 속도로 1만2000명에 달하는 승객을 실어 날랐다.

하지만 핸콕의 사업은 점차 어려움에 부딪혔다. 당시 도로를 이용하려면 비용을 내야 했는데 기준은 무게와 탑승 인원이었다. 당연히 여러 사람이 탑승하는 버스 기능이었던 탓에 오토메이션은 이용료가 점차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인상됐다. 게다가 도심 내 이동 속도는 최고 시속 5마일을 넘지 못하는 규제도 난관이었다. 속도를 내지 못해 운행 횟수를 늘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증기기관 대형 이동 수단은 오토메이션 이후 30년 동안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러다 지붕의 전선 연결로 전력을 공급받아 운행되는 트롤리버스가 독일 베를린에 처음 등장한 게 1882년이다.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 국적까지 취득한 칼 빌헬름 지멘스와 그의 친형인 에른스트 베르너 지멘스의 아이디어다. 1881년 왕립예술협회(RSA) 저널에 개념적인 아이디어를 내놓고 상용화가 된 이후 지금도 유럽 내 트롤리버스로 남아 있다.

지금의 화석 연료 기반 내연기관 버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1892년 벤츠가 내놓은 ‘빅토리아’다. 당시 2인승이 주를 이루던 승용차 시장에서 6인승이 등장해 주목을 끌었다. 이후 탑승 공간이 점차 커지며 지금의 내연기관 버스 시대를 개척했다.

역사에서 보듯 버스는 동력만 바뀌었을 뿐 일정 노선을 정해 많은 사람의 편리한 이동을 제공하는 기능은 변함이 없다. 오히려 탑승자를 늘리기 위해 공간 확장 경쟁이 펼쳐졌다. 굴절버스, 이층버스 등이 나온 것도 같은 이유다. 하지만 선진국일수록 버스 이용자가 줄어드는 게 고민이다. 그 때문에 오히려 많이 태우려는 공간의 효율성이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오랜 시간 이동 수단의 확장 정책이 가져온 또 다른 고민이다.

권용주 < 자동차 칼럼니스트 및 국민대 자동차·운송디자인학과 겸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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