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스페인 라코루냐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세상의 끝' 헤라클레스 등대, 대서양이 내 품안에…
스페인 북서부 도시 라코루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등대인 헤라클레스 등대가 있는 곳이다. 화가 파블로 피카소가 예술혼을 불태운 도시이기도 하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종착지. 오랜 순례를 마친 여행자들의 감격과 희열 가득한 표정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등대 헤라클레스 등대
라코루냐에 도착했을 때는 밤이었다.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호텔까지 가는 동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창문을 살짝 열었다. 무른 공기가 밀려들어왔다.
아침 일찍 호텔을 나섰다. 안개가 자욱했다. 가시거리는 100m도 채 되지 않았다. 안개 속에서 사람들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달리고 있었다.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느티나무 아래를 느리게 걸어갔다. 안개 가득한 스페인에서의 첫 아침은 나쁘지 않았다. 안개 너머로 파도 소리가 들렸고 소리를 따라 가까이 다가가자 대서양의 푸른 물빛이 안개 너머에서 아른거렸다. 안개 속에서 가만히 서 있노라면 무언가를 조금씩 채워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주 오랫동안 음악을 듣지 못하다가 어느 날 이어폰을 귀에 끼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었을 때 느끼는 기분과 비슷하다. 여행도 마찬가지. 여행은 어쩌면 안개 속에서 오랫동안 서 있기, 오랜만에 들어보는 음악인지도 모른다.
오른쪽에 바다를 두고 걸었다. 안개 속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구글맵은 ‘헤라클레스 등대’가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가리키고 있었다.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 지방에 자리한 도시 라코루냐(La Coruna)는 낯설다. 갈리시아 지방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이곳에는 30만 명 가까운 주민이 살아간다. 사실 이 도시에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다. 그래도 여행자들이 찾아드는 이유는 헤라클레스 등대를 보기 위해서다. 웹사이트에 ‘라코루냐’를 검색하면 메시 등 스페인 축구팀 관련 뉴스가 훨씬 더 많이 나온다.
헤라클레스 등대의 이름은 ‘토레 데 에르쿨레스(Torre de Hercules·헤라클레스의 탑)’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등대다. 문헌상으로는 세계 7대 불가사의로 꼽히는 이집트의 파로스 등대가 가장 오래된 등대지만 1100년과 1307년 있었던 두 번의 대지진으로 파괴돼 지금은 그 모습을 볼 수 없다. 파로스 등대는 기원전 280년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파블로 피카소에게 영감을 준 등대
구글맵이 등대에 다 왔다고 알리는데 등대는 보이지 않았다. 입구에는 백파이프 연주자가 스코틀랜드 민요를 연주하고 있었다. 스페인에서 백파이프 연주를 듣게 될 줄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 갈리시아 지방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영국 웨일스,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과 함께 켈틱 문화권에 속한다고 한다.
거리의 악사를 뒤로 하고 사람들이 걸어가는 방향을 따라 걸어갔다. 그런데 문득, 갑자기, 불현듯, 눈앞에 거대한 등대가 나타났다. 거인처럼 보였다. 왜 헤라클레스 등대라고 부르는지 고개가 끄덕여졌다. 바로 눈앞에 있는데도 짙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뱃사람들이 왜 안개를 그렇게 무서워하는지 약간이나마 이해가 됐다. 앞에 뭐가 나타날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들을 집어삼킬 어마어마한 크기의 문어가 안개 속에 숨어 있을지 어떻게 알겠는가. 등대는 길을 안내해주는 역할을 넘어 그들에게 신앙과 같은 존재였을지도 모른다.
헤라클레스 등대는 스페인 지역을 점령했던 로마인들이 파룸 브리간티아(Farum Brigantia)를 건설했을 때인 1세기 후반에 등대와 경계 표시용으로 설치했다. 카이사르가 이곳을 정벌한 뒤 등대는 로마 제국의 선단이 영국과 아일랜드로 가는 길목을 밝혔다. 세워진 뒤 1900년의 세월 동안 전쟁과 약탈로 황폐해졌고 몇 차례 개축되면서 1791년 마침내 재점등했다. 그리고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등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물론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등대 벽면에는 처음 세운 로마 건축가의 이름인 ‘가이우스 세비우스 루프스’가 새겨져 있다. 입장료를 내고 탑의 내부 계단을 통해 상부로 올라갈 수 있다. 등대는 예술가에게도 영감을 줬다. 스페인 남부 출신으로 라코루냐 예술학교를 다닌 소년 파블로 피카소는 헤라클레스 등대가 서 있는 해변을 거닐며 예술혼을 꽃피웠다. 등대가 있는 풍경을 그린 초기 작품이 있다.
등대에 왜 헤라클레스가 들어갈까. 고대 신화 속에서 헤라클레스는 머리가 세 개, 몸이 세 개인 괴물 게리오네스를 쓰러뜨리고 라코루냐에 괴물의 머리를 묻고는 그 자리에 탑을 지을 것을 명했다. 헤라클레스 등대가 있는 자리가 바로 괴물의 머리가 있는 곳인 것이다.
이름에 걸맞게 탑은 거대하다. 탑 자체의 길이는 55m인데 높이 57m의 암석 위에 서 있으니 더 높아 보인다. 수면으로부터 112m 높이에서 깜빡이는 불빛은 50㎞ 밖에서도 보인다. 등대가 있는 ‘코스타 다 모르테(Costa da Morte)’의 뜻은 ‘죽음의 해변’이다. 그만큼 위험하다. 세계가 평평하다고 믿었던 고대 로마인들에게 이곳은 세상의 끝이었다.
야고보 시신이 묻혀 있는 콤포스텔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순례길 가운데 ‘산티아고 순례길’만큼 사람들의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길이 있을까. 순례자들은 발에 생긴 물집과 상처를 산티아고 순례길이 자신에게 준 특별한 선물이라 생각하며 기꺼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지팡이를 짚고 고행의 걸음을 내디딘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예수의 세 제자 중 한 사람인 야고보가 복음을 전하려고 걸었던 길이다. 유럽 각지에서 출발한 길들이 그의 발자취를 따라 야고보의 무덤이 있는 스페인 북서부의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한다. 야고보의 스페인식 표기는 ‘라고(lago)’, 여기에 성인을 뜻하는 ‘산(San)’이 합쳐 ‘산라고(San-lago)’가 됐다가 ‘산티아고(Santiago)’로 바뀌었다. 야고보는 어느 날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예수님의 계시를 받았는데, 당시 땅끝은 로마를 기준으로 했을 때 이베리아 반도였다. 야고보는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 순교했고 그의 시체가 있는 자리에 별이 떴다고 한다. 그리고 그 별이 가리키는 곳에 산티아고 대성당이 지어졌다. ‘콤포스텔라’는 라틴어로 ‘별의 땅(campus stellae)’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별이 점지한 야고보의 시신이 묻혀 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는 카미노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영어로는 ‘길(the way)’을 뜻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루트는 많다. 유럽 각지에서 출발한다. 포르투갈길, 은의 길, 북쪽길 등 다양한 루트가 있는데 그 가운데 ‘프랑스 길’이 가장 인기가 높다. 프랑스 남부 ‘생장피에드포트(Saint-Jean-Pied-de-Port)’에서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어진다. 길이는 무려 808㎞. 매일 매일 걸어도 30~40일이 걸린다.
순례자는 ‘크레덴시알(Credencial)’이라는 여권을 발급받는다. 이 여권이 있으면 알베르게(Albergue·순례자 숙소)에 묵을 수 있다. 하루에 2개 이상의 스탬프를 호텔과 알베르게, 성당, 순례자 사무실, 관광안내소 등에서 받을 수 있는데, 사무국 직원은 이를 근거로 날짜와 순례거리를 산정해 증명서에 기입해준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면 순례 완료 증서(Compostela)를 받는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파라도르 호텔
순례자들이 그토록 닿고 싶어 하는 도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이처럼 많은 의미를 품고 있는 도시지만 도시 자체만으로도 많은 매력을 지닌 곳이다. 가장 먼저 찾아야 할 곳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다. 성당 지하에는 야고보의 유해를 보관하고 있는데 순례자들은 이곳을 참배하면서 순례를 마감한다. 성당 앞에는 완주했다는 벅찬 감동으로 희열에 들떠 울음을 터뜨리는 순례자들도 볼 수 있다. 1075년 짓기 시작해 1211년 완공했다.
산티아고 광장에는 가리비를 가방에 단 사람들이 많다. 야고보 사도의 문장이 가리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배를 이용해 야고보의 시신을 스페인으로 옮길 때 풍랑 때문에 시신을 바다에 빠뜨리게 됐는데, 나중에 겨우 찾고 보니 가리비가 성인의 몸을 덮어 유해가 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방향을 표시하는 것도 노란색 가리비고, 성당 앞 오브라도이로 광장 바닥에도 가리비 모양이 새겨져 있다.
대성당 왼쪽에 자리한 우아한 건물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파라도르 호텔이다. 파라도르는 스페인에서 가장 유서 깊은 국영 호텔로 스페인 전역에 80여 개가 운영되고 있다. 왕과 귀족계급이 거주하던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답게 내부에는 기사의 갑옷과 투구, 당시의 가구, 화려한 샹들리에 등 볼거리가 많다.
대성당 가까운 곳에 순례사무국(Pilgrim’s Reception Office)이 있다. 이곳은 언제나 순례 완주 증명서를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로 붐빈다. 20대 젊은이부터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순례자들이 저마다 행복한 표정으로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10대 초반쯤 돼 보이는 아이는 부모 앞에서 인증서를 흔들며 좋아라고 폴짝폴짝 뛰었다.
부엔 카미노(Buen Camino). ‘좋은 여행이 되길, 너의 길에 행운이 있길…’이라는 뜻이다. 얼마나 예쁜 말인지. 순례자들은 길을 걸으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 말을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전한다고 한다. 내일이면 떠난다. 아쉽지만 언젠가는 산티아고에 꼭 다시 올 것이다. ‘언젠가는 꼭’이라는 말이 없다면 우리 인생은 얼마나 허망할 것인가. 사랑도 마찬가지 아닐 텐가. 언젠가 당신을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부엔 카미노.
라코루냐 = 글·사진 최갑수 여행작가 ssoochoi@naver.com
여행정보
영국 항공을 이용해 런던을 거쳐 라코루냐로 갈 수 있다. 유럽 여행은 유레일패스가 편하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에서는 아바스토스(Abastos) 시장에 가보자. 아케이드 형식으로 만들어져 있다. 치즈, 생선, 고기, 채소 등을 파는 상점들이 구역별로 들어서 있다. 현지인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오전 7시에 열어서 오후 2~3시에 문을 닫는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면 이 지역에서 나는 검은 돌인 아자바체(Azabache)로 만든 다양한 액세서리를 볼 수 있다. 가리비나 묵주, 십자가 등 종교 관련 액세서리를 사서 선물로 주는 것도 좋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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