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 박사의 인문학 산책 - 소포클레스와 민주주의 (15) 정의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그 다른 무엇을 ‘문화(文化)’라고 부른다. 문화란 향기 나며 유유자적하는 한 그루 나무를 가꾸는 과정이다. 누군가 오래전에 토양에 맞는 품종을 골라 씨앗을 정성스럽게 심고, 김을 매고 거름을 줬다. 그리고 바람, 비, 안개, 공기와 같은 자연의 섭리를 간구하고 자연의 혜택을 입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 가지를 치고 병충해에 시달리지 않도록 관리하면서 기다린다. 그러면 가장 적절한 순간에 세상의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래서 고귀한 꽃을 피운다.
복수동태법(復讐同態法)
인간은 이런 문화를 위해 도시라는 인위적인 공간을 창조했다. 달리 제한된 공간을 구획하고 그 안에서 살면서 다른 인간들과 관계를 맺어 상부상조하는 것이 문화를 구축하는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조온 폴리티콘(zoon politikon)’, 즉 ‘도시라는 공간에서 사는 동물’이라고 정의했다. 인간은 도시의 규율을 준수하면서 비로소 인간이 된다. 그 인간은 여전히 동물이지만, 자신의 직계 가족과 친족뿐만 아니라 자신과 상관없는 다른 가문, 이방인, 외국인들과 공존하려는 수고를 통해 인간이 된다. 가족과 친족이라는, 자신에게 익숙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관습과 습관이 삶의 유일한 잣대로 여기는 인간들은, 겉모습은 인간이지만, 사실 동물이나 다름없다. 그들에겐 문화가 없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를 정복한 한 이방인은 그것을 ‘정의’라고 선포했다. 그의 이름은 ‘함무라비’다. 함무라비는 바빌론 도시 한복판에 가로 225㎝, 세로 55㎝의 현무암에 서문과 282개 조항, 결문으로 구성된 ‘함무라비 법전’을 새겼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이 법전은 인류에게 인간다운 삶을 위해서는 도시가 필수적이며, 도시를 지탱하는 문법은 ‘정의’라고 말한다.
함무라비가 상상한 ‘정의’는 196, 197조항에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표현됐다. “만일 자유인이 다른 자유인의 눈을 다치게 했다면, 그의 눈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다치게 될 것이다. 만일 자유인이 다른 자유인의 뼈를 부러뜨렸다면, 그의 뼈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부러뜨려질 것이다.” 이것이 후에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알려진 복수동태법(復讐同態法)의 전형이다. 바빌론에는 귀족들의 땅을 빌려 노동하고 세금을 내는 소작농(무쉬케눔·mushknum)이 50%였고, 전쟁포로나 외국인 노동자들, 그리고 세금을 지불하지 못해 노예(와르둠·wardum)로 전락한 하층민들이 40%를 구성했다. 198, 199 조항을 보면 함무라비가 생각하는 정의의 한계가 드러난다. “만일 자유인이 소작농의 눈이나 뼈를 다치게 한다면, 자유인은 은 한 냥(570g)을 지불하면 된다. 만일 자유인이 다른 사람 노예의 눈이나 뼈를 다치게 한다면 은 반 냥(375g)을 지불하면 된다.” 함무라비 법전은 기원전 18세기 바빌론이라는 도시에 인간다운 삶을 위한 ‘정의’를 제정해 새겨 놨지만, 그것은 왕족과 귀족만을 위한 노리개였다. 바빌론의 소작농, 외국인, 외국인 노동자, 그리고 노예들의 삶에 함무라비 법전은 정의의 상징이 아니라 불의와 착취의 수단이었다.
호의(好意)
테베 왕 크레온은 오이디푸스를 자신의 도시로 데려가서 그 외곽에 감금하고 죽게 할 작정이다. 오이디푸스를 위한 일이 아니다. 오이디푸스의 시신이 자신의 왕권과 테베의 안녕을 보장해 줄 것이라는 델피의 신탁 때문이다. 크레온은 먼저 오이디푸스의 두 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를 납치해 테베로 이송하는 중이었다. 콜로노스의 시민들과 오이디푸스는 폭력을 행사하는 크레온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때 무대 위로 아테네 왕 테세우스가 자신의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등장한다. 오이디푸스는 테세우스에게 하소연한다. “그대가 보고 있는 크레온이, 내 두 딸을 내게서 빼앗아 갔소이다.”
이 상황은 테세우스에게 딜레마다. 테베 왕인 크레온이 자신이 왕으로 있는 아테네의 입구, 콜로노스에서 장님의 두 딸을 납치한 사건이다. 사실 오이디푸스와 그의 두 딸은 테베 시민이기 때문에 납치라기보다는 ‘본국 송환’ 사건이다. 테세우스는 장님이자 외국인인 오이디푸스의 말을 듣자마자 지체 없이 부하들에게 명령한다. “너희들 가운데 한 명은 되도록 빨리 저기 제단들이 있는 곳으로 가서, 백성들에게 제물 바치는 일을 중단하고, 더러는 걸어서, 더러는 말을 타고 두 길이 만나는 곳으로 속력을 다 내어 달려가도록 재촉하라.” 테세우스는 콜로노스에서 아테네를 위한 국가 의례를 치르는 중이었다. 그는 그 중대한 의례를 중단하고, 외국인 납치사건을 먼저 해결하라고 명령한다.
왜 테세우스에게 외국인 납치사건이 국가의례를 중단할만큼 중요한가. 테세우스는 말한다. “소녀들이 가버려서 내가 폭력에 졌다고, 여기 이 나그네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라.” 아테네 왕 테세우스에게 정의는 자신의 눈앞에서 폭력으로 불의한 일을 당한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그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행위다. 테세우스에게 정의는 자신의 눈앞에서 도움을 청하는 자에게, 심지어 그가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호의(好意)를 베푸는 용기다.
경청과 연민이 없는 정의는 폭력이다. 나는 정의로운가? 우리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인가? 정의는 오랜 시간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성찰이 없다면 폭력이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착각하고 쏟아내는 말이나 글들은 악취가 나는 잡담이자 편견일 뿐이다. 나에게는 문화가 있는가? 오랜 시간을 기다린 향기가 나는 ‘정의’라는 꽃을 피우기 위해 씨를 뿌린 적이 있는가?
■기억해주세요
경청과 연민이 없는 정의는 폭력이다. 나는 정의로운가? 우리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인가? 정의는 오랜 시간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성찰이 없다면 폭력이다.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착각하고 쏟아내는 말이나 글들은 악취가 나는 잡담이자 편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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