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저임금·일자리 목표 상충하는 '소주성'
'족보' 들먹이며 과오 인정 않고 버티지만
경험 많은 시민을 끝까지 호도할 수 없어
복거일 사회평론가·소설가
현 정권은 밖에서 들여다보기 어렵다. 핵심이 어떤 사람들인지,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북한의 영향은 얼마나 받는지, 알 길이 없다. 그런 사정은 현 정권이 전체주의적 특질을 짙게 띠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깊다. 전체주의에선 인민들이 권력을 모두 지도자에게 바치고, 대신 지도자의 결정을 충실히 따른다. 그래서 인민들과 지도자 사이에 소통이 필요 없다.
이런 ‘민주집중제’는 ‘인민들은 어리석다’는 가정 위에 세워진다. 자연히, 인민들의 동원에 효과적인 무대 연출(stagecraft)이 국가 경영(statecraft)의 핵심이 된다. 무대 뒤의 실상을 알기 어려우므로, 러시아가 소련이었던 시절엔 ‘크렘린학(Kremlinology)’이 어엿한 학문 대접을 받았다. 소련 지도부에 관한 정보가 워낙 적으니, ‘행간을 읽는’ 기술이 필요했다. 북한 전문가들이 해온 일도 바로 그것이다. 근자에 우리 사회에서도 ‘크렘린학’이 중요해졌다.
“소득주도성장이라는 말은 상당히 세계적으로 족보가 있는 이야기”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모처럼 현 정권의 내부를 엿볼 틈새를 제공했다. “족보가 있는 이야기”라는 표현 자체가 현 정권의 지적 취향에 관해 시사적이다. 세상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원망이 서린 그 변명은 현 정권의 핵심이 소득주도성장 이론을 철석같이 믿었음을 보여준다. 주류 경제학자들이 외면하는 이론을 확신한 것은 그것이 그들의 경제 정책에 일관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경제 정책의 뿌리인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은 정권의 핵심 지지 세력인 강경 노조가 요구했다. 현 정권 자신은 ‘일자리 증가’를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이 두 목표는 상충한다. 최저임금을 올리면, 당장 노동에 대한 수요가 줄어드니, 일자리는 줄어든다. 그것이 경제학의 정설이다. 최저임금이 일자리를 줄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론적 근거를 내놓지 못한다. 그저 조사해 보니 일자리에 영향을 미치지 않더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늘 조사의 정확성에 대한 시비가 인다. 어쨌든, 최저임금 지지자들도 가파른 인상은 문제를 낳는다고 인정한다.
소득주도성장 이론은 최저임금의 가파른 인상과 일자리 창출을 조화시킨다. 최저임금 인상이 근로자들의 소득을 올려서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형성한다는 얘기다. 입맛에 맞는 그 이론을 현 정권은 확신했고, 기대한 효과가 나오지 않아도, 기다려보자고 했던 것이다.
마침내 그들도 자신들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전체주의자들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못한다. 그런 인정은 ‘결코 잘못을 저지를 수 없는’ 지도자의 오류를 인정하는 것이다. 1930년대 소련의 ‘부하린 재판’이 그런 논리를 선명하게 드러냈다. 그래서 통계를 주물러서 ‘통계주도성장’이란 야유를 받았고, 그것으로 부족하자 이전 정권부터 날씨를 거쳐 국제 환경에 이르기까지 남 탓을 했다. 기다려보자는 얘기를 더 할 수 없게 되자, 이번 변명이 나왔다.
‘족보’를 들먹인 변명은 정책을 바꾸지 않겠다는 의도도 드러냈다. 잘못된 정책으로 경제가 허물어지니, 당장 바꾸는 것이 국가와 시민의 이익이다. 그러나 정책을 바꾸면, 그것이 경제를 무너뜨렸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한번 과오를 인정하면, 분노한 민심에 정권이 흔들릴 위험이 크다. ‘족보’에 있는 정책이라고 얼버무리면서 과오를 인정하지 않은 채 버티는 편이 낫다고 계산했을 터이다.
대신 상황이 훨씬 나은 정치 분야에서 승부를 내기로 결정한 듯하다. 국가 기관들과 언론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해서 권력을 더욱 세게 움켜쥐고, 무대 연출로 시민들의 지지를 받겠다는 얘기다.
그러나 세상은 계산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권력을 더욱 세게 움켜쥐려고 생각해낸 법안들이 워낙 문제적이어서 시민의 걱정을 불렀고, 그것들을 무리하게 통과시키려는 시도는 자유주의 야당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가장 화려한 무대인 ‘판문점’은 북한의 미사일 발사로 다시 관객을 모으기 어려울 것이다.
전체주의자들의 신조대로, 인민은 어리석다. 그러나 경험에서 배우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대한민국처럼 발전되고 민주주의의 경험이 긴 사회에선 더욱 그렇다. 이것은 ‘크렘린학’이 필요하지 않은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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