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포스트 하노이’ 전략이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미국과의 정상 회담 ‘틀’을 유지하면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이사국들을 상대로 국제 여론전을 펴는 양동 전법이다. 2017년부터 가해진 유엔 안보리의 대북 경제제재를 해제하는데 집중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들 제재가 핵·미사일 실험을 이유로 공표된 만큼 약 15개월 간 실험을 중단한 현 상황에선 해제되야한다는 게 북한의 논리다.
‘2·28 하노이 결렬’ 이전만해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담판으로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노이 회담 직전까지 양측 실무협상팀은 연락사무소 개설 등 관계 정상화와 관련된 부분엔 전격 합의했으나 비핵화에 대해선 두 정상의 ‘협상’에 맡기기 위해 공란으로 비워놨다. 김정은은 문재인 대통령의 적극적인 중재 덕분에 트럼프 대통령과의 친서 외교를 활발히 펼쳤고, 이 과정에서 트럼프 대통령과의 협상에 자신감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은은 트럼프 대통령이 적어도 이전 정부와는 달리 ‘전부 아니면 전무’ 전략을 고수하지 않을 것이란 확신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이 왜 이런 확신을 갖게 됐는 지는 상당한 논쟁 거리다. 문 대통령의 확신이 김정은에게까지 전달됐거나, 트럼프 대통령 특유의 허풍 어법이 김정은의 오해를 낳았을 수도 있다. 일각에선 트럼프 대통령이 적어도 하노이 회담장에 들어서기 전까지만해도 김정은과 북한 비핵화 해법에 대해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 같은 시각은 트럼프 대통령과 존 볼턴 국가안전보장이사회 보좌관 등 보수적인 참모진들과의 대립을 강조하는 편인데, 이들은 막판에 트럼프 대통령이 국내 정치적인 문제로 인해 ‘매파’ 참모진의 견해를 전격 수용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이유가 무엇이었건 간에, 김정은은 ‘하노이 결렬’로 뒤통수를 제대로 맞았다. 이용호 북한 외무상이 3월1일 하노이 심야회견에서 표현했듯이 ‘(그들의) 역사상 처음으로 영변핵시설 영구폐기’라는 획기적인 카드를 꺼냈음에도 미국은 일언지하에 퇴짜를 놨다. 미국은 영변 외 다른 핵시설이 정상적으로 가동되는 상황에서 경제제재가 해제된다면, 미국 스스로 북한의 추가 핵무기 생산에 돈을 대주는 모순에 처하게 된다는 점을 끝까지 고민했다. 결과적으로 트럼프 대통령은 자칫 자신의 정치적 생명까지 위험해질 수 있는 결정은 내리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다.
김정은은 하노이에서 또 다시 열차를 타고 평양으로 복귀하면서 수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화가 났을 수 밖에 없을 것이고, 그들의 참모들은 주로 강경책을 건의했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실제, 북한은 동창리 미사일 발사대에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며 세계의 이목을 다시 한번 집중시켰다. 미 CSIS와 국가정보원 등의 분석에 따르면 북한은 지난해 9월 평양 남북정상회에서 공언한 풍계리 핵실험장과 동창리 발사대에 대한 국제사찰이 이뤄질 경우에 대비해 이벤트용 시설물을 짓고 있었다. 문제는 건설 작업이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에도 이뤄졌다는 점이다. 북한은 작업 이유에 대해 명확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무언의 위협을 미국과 국제사회를 향해 던진 것이다.
북한 내 강경파의 움직임은 3월15일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의 평양 기자회견에서 절정에 달했다. 최선희는 이용호와 함께 하노이에서 긴급 심야회견을 했던 인물이다. 그의 거친 입은 늘 미국을 공격하는데 사용되곤 했는데, 이런 이유로 미 언론은 최선희의 기자회견을 ‘공견견의 귀환’이라고 표현했다. 최선희는 러시아 등 친북 언론들을 모아 놓고, 공개적으로 미국을 비난했다. 강도같다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김정은 성명’이 조만간 있을 것이라는 등의 위협도 서슴치 않았다. 한국을 비롯해 세계의 언론은 북핵 협상이 평창 동계올림픽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보이기도 했다. 4월11일로 예정돼 있는 최고인민회의 전에 김정은이 ‘새로운 길’을 천명할 것이란 전망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하지만 최근 북한의 행보는 김정은이 내부 강경파의 입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징후다. 얼마 전엔 유엔대표부 대사와 베이징, 모스크바 주재 대사를 불러들이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외교의 타깃을 미국에서 유엔 안보리로 바꾸고 있다고 분석한다. 하노이 회담 결렬 직후 이용호가 주장한 민생과 관련한 경제 제재를 무너뜨리는 게 목표라는 얘기다.
유엔 안보리가 2017년 북한에 가한 3건의 제재는 2371호, 2375호, 2397호다. 각각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도발, 6차 핵실험, ICBM 화성-15형 발사를 이유로 결의됐다. 중국, 러시아를 포함해 15개 이사국 전원 만장일치로 단행됐다. 이들 제재는 북한을 옥죄는데 매우 효과적임이 입증됐다. 북한은 거의 모든 물품을 수출할 수 없게 됐고, 원유 공급도 최소한으로 제한받았다.
북한은 중국, 러시아를 지렛대 삼아 경제제재의 해제를 유엔 안보리 안건으로 올리는데 집중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안보리 제재문에도 북한이 실질적인 비핵화 조치를 취할 경우 제재를 해제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약 15개월 간 핵과 미사일 실험을 중단했고, 북한핵의 심장이라고 주장하는 영변핵시설을 영구폐기하겠다고 약속한 만큼 제재를 해제해야한다는 게 북한의 논법이다.
북한이 양동 전략의 일환으로 유엔 안보리 이사국을 공략한다고 해도 실제 제재 둑이 무너질 가능성은 낮다. 미국 주도의 유엔 안보리에서 미국의 동의없이 제재 해제가 이뤄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위원회를 이끄는 크리스토프 호이스겐 유엔주재 독일 대사도 당분간 대북제재 해제 논의는 없을 것이라고 이달 초 강조한 바 있다. 그는 “하노이 정상회담 결과에서 알 수 있듯,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 조치를 원하는 국제사회의 목표에 조금도 근접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럼에도 북한은 왜 양동 전략을 펴는 것일까. 한국이라는 ‘파트너’의 존재가 가장 큰 이유로 꼽힌다. 우리 정부가 북한의 국제 여론전을 도와주고, 미국을 설득해준다면 제재의 둑에 구멍을 낼 수도 있다. 실제 문 대통령은 평양 정상회담 직후 유럽 순방길에서 북한의 비핵화 조치에 상응하는 유엔 안보리 제재 해제에 대해 논의할 필요성이 있다고 설파했다. 최선희가 15일 평양 기자회견에서 한국을 향해 “중재자가 아니라 플레이어다”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북한을 도와야 할 당사자로서 적극 활약해달라는 압박이라는 얘기다.
북한의 이 같은 ‘포스트 하노이’ 전략은 향후 우리 정부의 입장을 매우 곤란하게 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 조야에서도 한국은 중재자가 아니라 한미동맹의 당사자라며 북한편에 서지 말 것을 경고하고 있다. 북한과 미국의 중간에서 한국의 외교는 샌드위치 신세가 돼 버렸다. 게다가 북한은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에서 철수한다고 한 지 사흘만에 일부 직원을 복귀시키는 등의 변덕마저 부리고 있다. 우리 정부를 진정한 파트너로 보고 있는 지조차 의문스럽다. 길어지는 청와대의 침묵은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방황하는, 고민의 깊이를 웅변한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