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역(逆)전세난 우려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전셋값이 10% 떨어질 경우 3만2000가구에 달하는 임대가구(집주인)가 전세보증금을 세입자에게 돌려줄 수 없을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다만 최근 전셋값 하락이 금융시스템의 위기로 확산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관측이다. 한국은행은 19일 이 같은 내용을 담은 보고서인 '최근 전세시장 상황 및 관련 영향 점검'을 발표했다.
◆"전셋값 10% 하락 시 빚 보유 집주인 중 1.5% 보증금 반환 못한다"
한은은 앞으로 전셋값이 10% 떨어진다고 가정하면 보증금 관련 부채를 보유한 주택 임대가구 211만가구(지난해 3월 말 기준)의 1.5%(3만2000가구)가 금융자산 처분과 금융기관 차입으로도 보증금 반환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는 집주인이 후속세입자를 구해 전세 보증금 하락분만 임차인에게 돌려줘야 하는 경우에도 보증금을 전액 돌려주지 못하게 되는 수치다. 한은은 통계청의 '2018년 가계금융복지조사'를 바탕으로 임대인의 보증금 차액(전셋값 하락 전 보증금-하락 후 보증금) 반환능력을 분석해 이 같은 수치를 시산했다.
3만2000가구의 반환 부족 자금 규모는 2000만원 이하가 71.5%로 주류를 이뤘고, 2000~5000만원 수준이 21.6%였다. 5000만원이 넘게 반환자금이 부족한 가구도 6.9%로 2000가구를 넘었다.
변성식 한은 금융안정국 안정총괄팀 팀장은 이에 대해 "임대가구가 평균적으로 2채 이상 주택을 보유한 점에 비춰 실제 영향을 받는 세입자 가구 수는 더 많을 것"이라면서도 "반환 부족자금 규모는 2000만원 이하가 대다수였다"고 설명했다.
다만 대다수의 임대가구는 보유 금융자산을 매각하거나 금융기관에서 차입하면 세입자에게 보증금을 전액 돌려줄 수 있는 상황으로 나타났다. 92.9%(196만가구)의 임대가구는 보유한 금융자산을 처분할 경우, 5.6%(11만8000가구)는 주택담보대출 등 차입 등을 통해 전세보증금을 반환할 능력을 갖췄다.
후속 세입자를 구하지 못할 정도로 주택시장이 악화된다면 보증금 반환에 어려움을 겪는 가구 비중이 14.8%로 뛰는 것으로 한은은 추산했다. 59.1%의 임대가구는 금융자산 처분을 통해, 26.1%의 가구는 금융자산 차입을 거쳐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반환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변 팀장은 "대부분의 임대가구가 전셋값이 하락하더라도 대응할 수 있겠지만 전세가격이 크게 하락한 지역이나 레버리지(자산 대비 부채)가 높은 임대주택 등을 중심으로 보증금 반환 관련 위험이 증대될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올해 전셋값 하락 아파트, 지역별·가격별로 상이"
최근 전셋값 하락 추세가 지방에서 수도권으로 번지고 있지만 전방위적으로 나타난 상황은 아니라고 한은은 선을 그었다. 지난해 신규 아파트 입주물량이 예년보다 크게 늘면서 관련 지역 전세가격 하락을 이끌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특히 주력산업이 침체된 울산, 경남 등 지방과 보증금이 낮은 아파트를 중심으로 전셋값 하락이 나타났다.
한은이 올해 1~2월 아파트 실거래가를 분석한 결과, 전셋값이 2년 전보다 하락한 전국 광역 시·도는 13개 지역으로 지난해(11개)보다 늘었다.
올해 1~2월 전국에서 거래된 아파트 중 전셋값이 2년 전보다 하락한 아파트의 비중은 52%에 달해 지난해(39.2%)보다 12.8%포인트 늘었다. 전셋값이 10∼20% 내린 아파트는 14.9%였고, 30% 이상 하락한 아파트도 4.7%를 기록해 비중이 상승세를 나타냈다.
수도권, 지방 모두 전셋값 하락 비중이 증가했다. 전세 공급 대비 수요 상황을 나타내는 전세수급지수는 지방은 2017년 1월, 수도권은 2017년 12월 이후 공급 우위 기조로 전환한 상태다. 올해 2월 지방 및 수도권 전세수급지수는 각각 82.4, 83.3을 기록해 통계치를 확보한 2012년 7월 이후 가장 낮았다.
변 팀장은 "전세가격이 10% 이상 하락한 아파트 비중에서 보증금 3억원 미만 아파트의 경우 차지하는 비중의 상승폭이 보증금 5억원 이상 고가 전세에 비해 높은 편이었다"며 "전세보증금 3억원 미만 아파트가 많은 지방을 중심으로 전셋값이 크게 하락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전셋값 하락세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다만 내년 신규 아파트 입주 물량 추이 등에 따라 중기 추세는 달라질 수 있다는 관측이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 수석전문위원은 "역전세난 현상이 나타나고 있지만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은 아니다"며 "전세가격은 공급 등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특성이 있는 만큼 내년 신규 아파트 입주 물량 감소를 고려해 추이를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민간조사기관인 부동산114에 따르면 올해 전국 신규 아파트 입주 예정 물량은 38만가구로 지난해(56만가구)보다 줄었다. 내년에는 한층 줄어든 약 29만가구가 공급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전셋값 하락, 금융시스템 안정성 위험 크지 않아"
한은은 "최근 전셋값 하락이 금융시스템의 안정성을 위협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진단했다.
전세가격이 더 떨어지더라도 임대가구의 재무건전성이 대체로 양호하고, 전세자금대출도 우량차주 비중이 높아 부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낮다는 분석이다. 전셋값 하락은 세입자의 전세보증금 반환 부담 증가와 전세자금대출 건전성 저하 등을 통해 금융안정 측면에서 위험 유발요인이 될 수 있다.
임대가구는 지난해 3월 기준 소득분위 기준으로 4~5분위의 고소득 비중이 64.1%에 달했다. 실물자산도 가구당 평균 8억원을 보유해 총자산(금융 및 실물자산) 대비 총부채(보증금 포함) 비율은 26.5%로 낮은 수준이라는 평가다. 총자산보다 총부채가 많은 임대가구는 전체의 0.6%에 불과했다.
또한 전세자금대출 차주는 신용등급이 1∼3등급으로 높은 차주 비중이 81.9%(지난해 3분기 말 기준)로 신용 측면에서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취약차주 비중은 3.8%로 가계대출 전체(6.1%)보다 낮았다.
이 같은 분석은 역전세난과 깡통전세가 가계대출의 급격한 부실을 초래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금융위원회의 전망과 궤를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말 기준 전세대출 규모가 92조5000억원으로 가계부채 총량의 6.4% 수준에 그친다는 점도 이 같은 관측을 뒷받침하고 있다.
전세자금 대출은 2016년 이후 빠르게 증가했으나 수도권 전세가격 하락, 대출 규제 강화 등으로 최근 증가세가 둔화되고 있다. 아울러 지난해 말 국내은행의 전세자금대출 연체율은 0.18%로 전체 가계대출 연체율(0.25%)을 밑돌고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금융권에서는 전셋값 하락이 집값 하락을 연쇄적으로 일으킬 경우 임대가구와 세입자가 받은 대출이 함께 부실화될 가능성 등을 우려하고 있다. 주택도시보증공사(HUG)에 따르면 세입자가 집주인에게서 전세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전세보증금 반환보증 사고 건수는 2017년 33건에서 지난해 372건으로 1년 새 10배 이상으로 뛰었다.
서영수 키움증권 연구원은 "정부의 구조조정 정책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변수는 주택가격과 전세가격이 될 것"이라며 "전세가격 하락으로 디레버리지(부채 감축)가 본격화되면 다주택자의 채무 재조정과 함께 주택가격 조정이 함께 나타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그는 "올 2분기 중에는 서울 전역이 역전세 국면에 진입, 본격적인 부채 구조조정 양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오정민 한경닷컴 기자 bloom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