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교수의 한국경제史 3000년 (3) 역사시대로의 이행 (상)
인류 역사는 국가의 성립을 전후해 원시 선사시대와 문명 역사시대로 구분된다. 한반도에서 문명 역사시대로의 이행은 기원전 4세기 이후 장기에 걸쳐 완만한 과정을 밟았다. 기원전 4세기 한반도에 새로운 형태의 토기와 동검을 제작하는 청동기 문화집단이 출현했다. 이 집단에 밀려 송국리형으로 대표되는 기존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2세기까지 소멸했다.
흉노 계통 옛 조선은 청동기 집단
기원전 4세기 이후 중국 대륙은 전국시대의 혼란에 접어들었다. 동세기 중엽 중국인은 요하(遼河) 하류의 동쪽을 무대로 활동하는 조선(朝鮮)이란 정치체를 인지했다. 기원전 3세기 전반 조선은 요동으로 진출한 연(燕)과 충돌했다. 조선은 연에 밀려 한반도 청천강 이남의 평양으로 그 중심을 옮겼으며, 연은 그 이북에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한반도에 들어온 최초의 정치체 조선은 원래 스키타이, 오르도스, 요서의 넓은 지역을 무대로 하는 흉노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문화집단이었다. 이 같은 정치적 변화와 같은 기간 벌어진 청동기 문화집단의 단절적 교체는 밀접한 상관을 지녔을 터다.
철기시대와 문자생활 시작
연의 서북 진출과 더불어 한반도에 철기시대의 문이 열렸다. 평북 영변군 세죽리 유적에서는 도끼, 낫, 칼 등 철제 농공구가 대량 출토됐다. 이후 철기 문화는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거나 동부로 확산했다. 중부 이남에서는 청동기 문화가 강한 저항세를 보였다. 기원전 2세기 말 연이 망하자 위만(衛滿)이 조선으로 망명해 왕위를 찬탈했다. 조선의 준왕(準王)은 그의 무리를 이끌고 마한으로 내려가 왕이 됐다. 위만조선의 성립은 중국 철기 문화의 확산을 자극했다. 기원전 108년 한(漢)은 위만조선을 정복해 그 지역에 군현을 설치했다. 위만의 무리는 소백산맥을 넘어 진한과 변한으로 이동했는데, 이는 그 지역에 철기 문화를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한이 설치한 군현은 기원후 313년까지 421년간이나 존속했다. 그 범역은 오늘날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전역에 걸쳤다. 원래 4개 군인데, 얼마 후 낙랑군으로 통합됐다. 전성기 낙랑군 산하에는 25개 현이 있었으며, 인구는 6만3000호, 40만7000명에 달했다. 한반도에 설치된 중국 군현은 대륙의 선진 문물이 유입되는 창구 역할을 했다. 한의 화폐, 거울, 철기가 연안을 따라 서남과 동남으로 널리 유포됐다. 한반도 주민의 문자 생활도 한 군현의 설치와 더불어 시작됐다. 기원후 1세기께 중국인은 낙랑의 백성이 구습에서 벗어나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읊는다고 했다.
미사리 유적의 부뚜막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까지의 기간에 속하는 주거지나 취락 유적은 거의 발굴되지 않고 있다. 그만큼 그 기간 문화적 단절과 정치적 교체가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2세기 이후 취락은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전 시대와 비교해 2세기 취락 유적에서 확인되는 중요한 변화는 개별 주거지에 취사시설로 부뚜막이 설치됐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1987~1992년 발굴된 한강 중류의 미사리 유적이 잘 알려져 있다.
이 유적은 몇 개의 문화 지층으로 이뤄져 있다. 청동기시대 지층에서 발굴된 주거지는 37기인데, 부뚜막이 한 군데도 없다. 원삼국시대(1~3세기) 지층에 속하는 주거지는 20기인데, 그 가운데 17기에 부뚜막이 설치됐다. 부뚜막은 주거지 내부 벽에 돌과 점토를 섞어 붙이는 형태로 만들어졌는데, 토기를 올려 조리할 수 있는 구조로 돼 있다.
인근 남양주시 장현리 유적에서도 같은 현상이 관찰됐다. 여기서는 청동기시대, 원삼국시대, 백제시대(4~6세기)에 걸치는 170기의 주거지가 발굴됐다. 부뚜막은 원삼국시대 설치되기 시작했다. 청동기시대부터 내려오는 주거지 내 노지는 한동안 부뚜막과 병존하다가 3세기까지 모두 자취를 감췄다.
▶하편에서 계속
■기억해주세요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후 1세기까지의 기간에 속하는 주거지나 취락 유적은 거의 발굴되지 않고 있다. 그만큼 그 기간 문화적 단절과 정치적 교체가 심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2세기 이후 취락은 다시 번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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