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의 한국경제史 3000년
(39) 근대화의 물결
1910년 이후 인구 폭발적 증가
방직·기계공업, 토목공사 활발
3·1운동 이후 취학률 크게 상승
생활수준 개선으로 수명 연장
日과의 소득격차 벌어졌지만 조선 상위 소득자도 꾸준히 늘어
'제국의 후예'로 폄훼된 경성방직
뛰어난 경영·종업원 학습능력으로 日 자본과의 경쟁서 살아남아
인구 증가
1925년 최초의 국세조사(國勢調査)가 행해졌다. 이에 따르면 당시 조선의 총인구는 일본인과 외국인을 포함해 1827만 명이었다. 이는 1940년까지 2430만 명으로 증가했다. 1910년의 인구는 몇 가지 추계가 있는데, 가장 믿을 만한 수치는 1633만 명이다. 일본인과 외국인 수는 1910년 18만 명에서 1940년 75만 명으로 증가했다. 이들을 제외한 조선인은 1910년 1615만 명에서 1940년 2355만 명으로 46% 증가했다. 일본과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이 있는데, 각각 184만 명과 103만 명이었다. 이를 더한 1940년 조선인 총수는 1910년에 비해 64% 증가했다. 가히 폭발적인 증가였다. 보건과 위생의 개선이 주요 원인이었다. 총독부는 전염병 예방과 질병 퇴치를 위한 보건·위생제도를 효과적으로 구축했다. 경제성장에 따라 영양상태가 개선된 것도 다른 한편의 원인이었다.
도시의 발달
도시, 곧 부(府)의 수는 1925년 12개에서 1940년 20개로 증가했다. 조선왕조의 수도 한성부(漢城府)는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됐다. 1920년 경성부 인구는 25만 명을 조금 넘었는데, 조선인은 18만 명이었다. 이후 1945년까지 경성부 인구는 99만 명으로 늘었다. 그사이 인접 군역(郡域)을 포섭해 부역(府域)이 대폭 확장됐다. 경성, 평양, 부산, 청진, 대구, 인천의 6대 부 인구는 1930년 88만 명에서 1940년 202만 명으로 증가했다. 도시의 아스팔트, 수은등, 쇼윈도, 마네킹, 백화점, 고층건물, 엘리베이터, 카페, 그 사이를 누비는 ‘모던 보이’와 ‘모던 걸’은 뭇 젊은이의 선망으로 근대문명의 상징이었다.
인구가 가장 크게 증가한 도(道)는 경기였다. 경성과 인천에서는 방직과 기계·기구 공업이 발달했다. 다음은 함북이었다. 거기서는 중화학공장 건설과 항만·철도·도로 토목공사가 활발했다. 인구를 가장 많이 방출한 도는 경북, 경남, 전북으로 모두 농업지대였다.
교육
1910년대까지 조선인의 교육에 대한 열의는 낮은 수준이었다. 1918년까지 보통학교의 보급은 제한적이었으며, 적령기 아동의 취학률도 3%에 불과했다. 1919년의 3·1운동은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일대 계기였다. 이후 교육에 대한 조선인의 태도가 달라져 취학률이 1925년까지 13%로 높아졌다. 그사이 보통학교 수도 늘고 교육기간도 일본인과 같아졌다. 취학률은 농가의 형편이 다소 개선되고 학비가 낮아진 1930년대에 다시 불붙었다. 취학률은 1932년 16%에서 1943년 47%까지 급하게 상승했다. 남아의 취학률은 60%를 넘었다.
1930년대에는 중등교육, 곧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 상업학교, 농업학교, 사범학교에 대한 수요가 팽창했다. 1935~1943년 인문계 학교는 85개에서 150개로, 실업계 학교는 65개에서 118개로, 사범학교는 4개에서 15개로 증가했다. 입학생 총수는 1935년 9500여 명에서 1942년 2만1000여 명으로 증가했다. 그럼에도 중등교육에 대한 수요는 모두 충족되지 않았다. 1930년대 후반부터 일본의 중학교로 유학하는 조선인 학생이 증가해 1939년 그 수가 1만2500명이나 됐다.
초·중등 교육의 확충은 기업가, 기술자, 숙련공, 상인, 회사원, 조합원, 은행원, 공무원, 군인, 의사, 법률가 등의 근대적 계층을 양성했다. 이렇게 축적된 인적자본은 해방 후 한국인이 그들의 국민국가를 꾸려갈 수 있는 역사적 유산으로 작용했다.
생활수준
각급 역사책은 일제가 토지와 식량을 수탈해 조선인의 생활수준이 극도로 악화됐다고 서술해왔다. 쌀이 일본으로 수출된 것을 수탈이라 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시장거래였으며, 그 결과 조선의 총소득은 증가했다. 쌀이 대량 수출돼 1인당 쌀 소비량이 준 것은 사실이다. 그렇지만 만주에서 수입된 조, 수수, 콩 등의 잡곡류를 고려하면 곡물 소비량은 그리 감소하지 않았다. 감자, 고구마와 같은 보조 식품의 소비는 증가했다. 그 위에 육류, 채소, 과일, 어패류, 장류(醬類), 통조림, 기타 가공식품의 소비 증대를 고려하면 1인당 칼로리 섭취량이 과연 감소했는지는 의문이다.
생활수준과 관련해서는 식료만이 아니라 의복, 주거, 의료, 교통, 교육, 문화 등 다른 비목(費目)의 소비도 종합적으로 검토돼야 한다. 생활수준이 개선되면 식료품비 비중이 줄어든다(엥겔법칙). 1911~1939년의 1인당 소비지출 구성에 관한 연구는 그 법칙이 일제하 조선에서도 타당함을 보였다.
생활수준에 관한 또 하나의 지표는 신장이다. 행려(行旅) 사망자, 곧 여행 중에 사망한 무연고자의 신장을 조사한 연구가 있다. 1881~1890년 출생자 1027명의 평균 신장은 158.4㎝인 데 비해, 1911~1920년 출생자 1125명은 160.2㎝다. 최하층에 속할 이들의 신장 추세는 일정기에 들어 조선인의 영양과 위생이 개선됐음을 말해 주고 있다.
도시 비숙련 노동자의 실질임금 추이에 관한 연구도 같은 결론에 이르고 있다. 앞서 소개한 대로 인구가 급하게 증가했다. 사망률 감소가 그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 출생 시의 기대여명(期待餘命)이 1925~1930년 37.4세에서 1935~1940년 40.9세로 길어졌다. 이 같은 인구 현상도 생활수준과 무관하지 않다.
소득분배
민족 간 소득분배에 관해서는 자료의 부족으로 상세히 알기 어렵다. 경제성장이 일본인의 주도로 이뤄진 만큼 조선인의 몫은 상대적으로 작아졌을 것이다. 농촌 인구의 다수는 소작농이었으며, 일본인 지주의 토지는 점점 많아졌다.
도시부에 관해서는 경성에서 영업세를 납부한 상공인을 모집단으로 해 영업세의 크기, 민족별 구분, 자본형태, 업종 등의 상관관계를 분석한 연구가 있다. 자본형태는 개인인가 회사인가의 차이를 말한다. 영업세의 격차를 발생시킨 주요 요인은 자본형태와 업종의 차이였다. 자본형태가 회사이면서 제조업과 토건업에 종사할 경우 소득이 가장 높았다. 의외로 조선인이냐 일본인이냐의 민족 요인은 유의(有意)하지 않았다.
요컨대 민족 간 소득분배가 악화된 것은 일본으로부터 제조업에 종사하는 회사 형태의 대자본이 유입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일본인 영업자의 25%가 회사 형태이던 데 비해 조선인 영업자의 그것은 9%에 불과했다. 조선인은 자본과 기술의 부족으로 제조업 종사자의 비중이 낮았다.
민족 간 소득분배가 악화됐다고 해서 조선인의 소득수준이 낮아진 것은 아니다. 전국적 범위의 영업세 납부자 가운데 조선인의 비중은 1930년 64%에서 1938년 72%로 증가했다. 영업세 납부자의 상위 25%에서 조선인의 비중은 42%에서 52%로 늘어났다. 문제는 상위 10% 이상의 최고소득 구간이 온통 일본인이란 데에 있었다. 일제하 경제성장의 과실이 죄다 일본인의 차지였다는 주장은 듣기엔 그럴듯하지만 실제의 역사와는 거리가 멀다.
대군의 척후
일제하에서 성장한 근대적 계층에 대한 역사가의 평가는 우호적이지 않다. 일제의 지원으로 성장했고 일제의 지배에 협력했다는 이유에서다. 조선인 자본으로서 가장 성공한 경성방직(京城紡織)은 ‘종속적 자본주의’의 상징으로 치부됐다. 카터 에커트는 경성방직을 총독부의 보조금을 받았다는 이유에서 ‘제국의 후예(offspring of empire)’라고 폄훼했다. 일제가 낳고 길렀다는 뜻이다. 과연 그랬던가. 창업자 김성수는 전북 고부의 대지주 가문 출신으로 1914년 와세다대를 졸업했다. 1917년 일본계 조선방직이 부산에 진출한 데 자극을 받아 1919년 직기 100대의 경성방직을 창립했다.
경성방직은 일본계 자본과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살아남았다. 경성방직의 회계장부를 분석한 주익종은 이 회사가 창립 몇 년도 안돼 손익분기점을 통과했으며 이후에도 위기에 봉착한 적은 한 번도 없음을 명확히 했다. 회사는 총독부의 보조금에 사활을 걸지 않았다. 조선방직 등 다른 경쟁업체도 보조금을 수령했다. 경성방직의 성공은 경영이념으로서의 강력한 민족주의, 경영진의 뛰어난 능력, 종업원의 수월한 학습능력 덕분이었다. 소설가 이광수는 경성방직을 ‘대군의 척후(斥候)’에 비유했다. 언젠가 민족의 독립과 함께 대군처럼 수많은 기업이 세워질 터인데, 경성방직이 그 척후병과 같다는 뜻이다. 이후 전개된 역사는 이 불운한 지식인의 예견대로 흘렀다.
이영훈 < 前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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