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옛 서울역사서 열리는 '커피사회'展
[ 김보라 기자 ] “나는 그래도 경성역을 찾아갔다. 빈자리와 마주 앉아서 이 쓰디쓴 입맛을 거두기 위하여 무엇으로나 입가심을 하고 싶었다. 커피- 좋다.”
건축가이자 시인 이상의 《날개(1936)》에 등장하는 문구입니다. 이상은 경성의 제비다방을 운영할 정도로 커피와 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날개 속 주인공은 경성역 2층에 있던 국내 최초의 서양식 레스토랑 ‘그릴’에 커피를 마시러 들어갔다가 주머니에 돈이 한 푼도 없는 것을 깨닫고 돌아섭니다. 1930년대 경성역은 철도역 이상으로 근대적 문물을 소개하던 공간이었습니다. 끽다점(찻집)과 양식당, 엘리베이터 등이 한 공간에 모여 모던보이들이 시간을 보내던 곳.
다방이 등장한 지 약 100년이 지난 2019년. ‘문화역 서울 284’로 재단장한 이 공간에 ‘커피사회’라는 전시회(사진)가 열리고 있습니다. “커피는 우리에게 무엇일까”라는 물음에서 시작했다고 하지요. 옛 서울 역사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에서 국내 커피 문화의 변천사를 돌아보고, 유명 로스팅 카페의 커피를 무료로 마셔볼 수도 있습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티켓 대신 종이컵을 하나씩 나눠줍니다. 이 컵으로 전시장 곳곳에 마련된 카페에서 커피를 받아 마실 수 있는데요. 펠트커피, 대충유원지, 매뉴팩트, 보난자커피, 프?츠커피, 헬까페, 콜마인, 브라운핸즈 등 카페들이 2월17일까지 차례로 커피를 내립니다.
중앙 복도에는 ‘커피, 케이크, 트리’라는 박길종 작가의 작품이 눈길을 끕니다. 5단 케이크 안에 낡은 공중전화기, 보온병, 맥심 커피 프리마, 찻잔과 난로, 주전자까지 한데 모아 추억을 자극합니다. 대합실에는 제비다방, 낙랑팔러, 멕시코다방 등 1930년대 경성의 다방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192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다방은 단순히 커피 마시는 공간이 아니라 문화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살롱이었지요. 제비다방은 이상이 운영했고, 낙랑팔러는 이상과 박태원 등이 속했던 모더니즘 단체 구인회 동인들이 모이던 곳입니다. 하이라이트는 귀빈예빈실에 차려진 ‘방’입니다. 커피원두가 바닥에 가득 깔린 방에서 사각사각 밟아보고, 손으로 만져 볼 수도 있습니다.
레스토랑 ‘그릴’이 있었던 2층에서는 등받이 높은 대합실 의자에 앉아 ‘요즘 커피’를 즐겨보는 것도 좋습니다. 5분 안에 뽑아드는 에스프레소 커피에 익숙하다면, 꼭 한번 가보시기를. 곧 도착하는 기차, 그 기차를 타고 돌아올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마시는 커피의 맛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겁니다.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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