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부문 임지선 씨
[ 은정진 기자 ]
“늦은 나이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 때문에 강박이 심했어요. 습작 기간이 길 거라고 봤거든요. 정유정 작가 말처럼 벼랑 끝에 자신을 세우기 위해 교사일까지 그만뒀습니다. 직장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선 안 된다고 생각한 거죠.”
2019 한경 신춘문예에서 ‘카스텔라’로 장편소설부문에 당선된 임지선 씨(49)는 3년 전만 해도 소설은 물론 평생 글 한번 제대로 써본 적 없던 평범한 과학교사였다. 생물학을 전공했고 20년 동안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무난하게 살아왔다.
2015년 7월 우연히 들은 한 소설가의 8주짜리 소설 합평(여러 사람이 모여 의견을 주고받으며 비평하는 것) 강의가 그의 인생을 완전히 뒤바꿔놨다. 임씨는 “소설가 선생님이 처음 써본 제 단편소설을 칭찬해줬고 그렇게 소설 쓰기에 꽂혔다”며 “취미로 적당히 시간 내 쓰는 게 아니라 진짜 사투하듯 치열하게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점점 커졌다”고 말했다.
작가 지망생들은 생계 문제로 대부분 출판일이나 편집, 서평 작성 등 문학 관련 일을 병행하며 글을 쓴다. 임씨는 되레 2017년 3월 교사를 그만두고 백수를 선택했다. 주변에선 퇴직까지 하며 소설을 쓰겠다는 그에게 ‘산에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니냐’며 빈정거렸다. 그는 “주변 시선이 너무 힘들었지만 그보단 몰입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았다”며 “늦게 시작했기에 읽고 쓰는 양이 누구보다 중요했는데 직장과 병행해 글을 쓰다 보니 일상생활이 망가졌다”고 말했다.
임씨의 소설 쓰기는 고시 공부를 방불케 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 연락을 끊고 생활패턴을 단순하게 했다. 교사를 그만둔 뒤 10개월 동안 문밖을 나가지 않은 채 하루 18시간씩 소설을 쓰며 지냈다. 그나마 최근 들어서는 비정규직 근로자들의 삶을 다룬 소설을 준비하기 위해 4시간짜리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새벽 3시 일어나 오후 2시 출근시간까지 하루평균 10시간만 소설을 썼다. 잠은 하루 너덧 시간만 잤고 밤엔 책을 읽었다. 국내 출간된 소설부터 소설 작법 책까지 3년 동안 그가 읽은 책만 1000권에 달한다. 10년 넘게 소설만 써온 다른 지망생들보다 한참 늦게 시작한 데 따른 극약처방이었다. 그는 “일반 소설뿐 아니라 국내에서 역대 문학상을 받은 소설까지 모두 읽었다”며 “심사평은 따로 발췌해 개인 비공개 블로그에 저장해 놓은 뒤 암기하듯 반복해 봤다”고 덧붙였다.
당선작 ‘카스텔라’는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치매’와 ‘탈북자’라는 두 가지 소재를 녹여낸 작품이다. 그는 “탈북민이 3만 명을 넘었고 난민 문제도 당면한 이슈다. 치매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다”며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 소설로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이어 “매번 내 경험담으로 소설을 쓰다가 처음으로 경험이 없는 소재로 쓰다 보니 탈북민이나 치매 환자 가족분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기도 했다”며 “이 때문에 탈북자 및 치매 관련 인터넷 자료와 유튜브 영상 등을 모조리 수집하고 취재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여러모로 부족해 당선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번에 두 번째 도전한 한경 신춘문예는 당선보다 마감에 대한 긴장감을 유지하기 위한 좋은 과정이었다고 했다. 임씨는 “안 뽑힐 거라 생각하면서도 마감 기간까지 퇴고하고 또 우체국에 가서 원고를 부치면서 긴장을 유지하고 싶었다”며 “거기서 오는 에너지가 긍정적인 힘을 가져다줘 당선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말했다.
임씨는 “‘사유하는 소설’을 쓰겠다”고 강조했다. 추리소설이나 사회문제를 다룬 소설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계속 다양한 장르를 시도해보고 싶다는 말도 더했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에 이런 소설은 없었지’라는 소설만 썼습니다. 매번 쓸 때마다 일종의 도전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기만 생각하고 깊게 생각할수록 소설을 못 쓰게 되더라고요. 그저 포기하지 않고 저 자신을 믿고 쓰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소설 당선작 '카스텔라' 줄거리
이야기는 모래가 영주 이모의 전화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화자는 두 사람이다. 엄마와 딸. 무해는 동네에서 길을 잃은 뒤 의사로부터 ‘초로기 치매’ 진단을 받는다. 65세 이전에 나타나는 치매를 초로기 치매라고 한다. 초로기 치매의 특징은 병의 진행 속도가 빠르고, 진단 후 생존 기간은 5~6년으로 짧다. 무해는 재난 때문에 국가를 탈출한 난민이었다. 무해는 남편이 사망한 뒤 남은 가족이라곤 하나뿐인 딸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기로 한다. 무해는 유년 시절 북한에서 즐겨 먹던 농마국수를 해 먹으며 딸에게 고백할 기회를 얻는다.
무해는 아내, 엄마라는 이름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 이름들은 무해에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것이었다. 그 이름들로 사는 것이 세계 속에 자신을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끼워 넣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무해에게 붙여진 또 다른 이름은 ‘난민’과 ‘후이구가’였다. 무해가 살았던 국경 도시들은 거친 세계였다. 무해가 부드러운 세계를 처음으로 맞본 것은 압록강을 통해 밀수로 들어온 카스텔라였다. 무해에게 카스텔라는 비일상의 이미지였다. 달콤함과 부드러움의 세계는 일상에 숨겨진 또 다른 욕망이었다.
한편 점점 사라져가는 기억과 사투를 벌이는 무해는 과거의 기억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천천히 다른 방식으로 쳐다보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천천히 보는 것은 무엇이든 각별하게 만든다. 기억은 시간이며, 자기 자신이었다. 왜곡된 기억보다 사실만을 적는 기록이 진실하다고 생각했던 무해는 어느 날, 기록하는 일을 중단한다. 적어도 왜곡된 기억은 자신이 대상과 사물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싶은지에 대한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첫눈이 오기 전, 무해는 자신의 짐을 정리한다.
결국 기억을 잃어가는 무해에겐 기록을 중단한 노트 하나만이 남는다. 무해에게 남은 건 관계였고, 무해가 남긴 것도 관계였다. 그리고 어느 날 모래는 카스텔라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는데….
※한경 신춘문예 당선 소설 ‘카스텔라’는 2월 중 카카오페이지를 통해 연재됩니다.
■당선 통보를 받고
"매일 심장이 뛰는 나…멀리 오래갔으면"
당선 통보 전화벨이 울렸을 때 나는 북한 관련 동영상에 한참 빠져 있었다. 정확히 42분 뒤 같은 번호로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당선 통보를 받고 가장 먼저 한 일은 한국경제신문사에 보냈던 소설을 다시 읽어보는 것이었다. 겁이 덜컥 났다.
‘2018 한경 신춘문예’에 처음 도전했고, 이번이 두 번째 도전이었다. 소설을 쓰면서 내가 분노가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사람을 싫어하고, 말을 좋아하면서도 말에 상처받았다. 내가 괜찮은 사람이 아니라서 소설을 쓰게 됐고, 쓰면서 겨우 사람을 이해하고 깊이 들여다보게 됐다. 특히 이번 소설은 쉽게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내가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내용이었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이용해 쉽게 써버린 글이 될까 봐 두려웠었다.
이 소설을 쓰면서 내게 큰 변화가 하나 있었다. 나는 그동안 소설 쓰는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로 인해 갈수록 피폐해지고 있었다.
소설을 쓰는 시간보다 쓰지 않는 시간이 훨씬 중요하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쓰지 않는 시간을 잘 보내야 좋은 소설을 쓸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소설 쓰는 시간을 줄이고 정해놓은 시간대에 정해진 원고량만 썼다.
그렇게 쓰는 시간과 쓰지 않는 시간의 균형을 맞춰가니 소설 쓰기가 훨씬 자유로워졌다. 매일 욕망을 누르고, 자기 절제를 하고, 시간 균형을 맞추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나는 비로소 인간으로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 매일 심장이 뛰었다. 멀리, 오래가고 싶다. 부족한 작품을 눈여겨봐준 심사위원 분들께 더 좋은 작품으로 보답하겠다는 약속으로 감사의 인사를 대신한다.
임지선 씨는 △1970년 충북 옥천 출생 △서원대 과학교육학과 졸업
■심사평
윤대녕 소설가·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윤성희 소설가 구병모 소설가
송종원 문학평론가·서울예술대 문예학부 교수
인간의 존엄에 대한 문답…이야기 속에 잘 녹여내
140여 편의 투고작 중 본심에 오른 작품은 ‘폴리테이아’ ‘케이크’ ‘추란의 고백’ ‘카스텔라’였다. 이 가운데 작품이 구현한 세계의 단순함이나 낯익은 주제의식 등의 이유로 두 편의 작품이 먼저 걸러졌고 최종으로 ‘추란의 고백’과 ‘카스텔라’가 경합했다. ‘추란의 고백’은 부동산 투기업을 소재로 한국 사회의 병든 모습을 날카롭게 그려냈다. 무엇보다도 디테일이 상당했다. 그런데 제재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들이 이 소설의 사실성에 힘을 부여한 데 비해 그것과 갈등하며 삶을 꾸려내는 인물들의 모습은 생생하지 못했다. 뻔한 죄의식의 서사와 출생과 관련한 반전 또한 이 소설의 매력을 약화시키는 면모였다.
급변하는 남북한 관계의 변화가 소설의 서사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일까. ‘카스텔라’는 북한과 중국의 경계를 넘어 남으로 내려온 한 인물의 기억에 관한 서사다. 치매를 겪는 이 여인에게 기억은 아주 절실한 문제로 다가오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기억의 태반은 고통스러운 것들이다. 소설은 고통을 겪는 인간이 어떻게 고통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을 지켜내는지에 대해,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이 그와 전혀 다른 사람과 어떻게 공동의 세계를 이룩하는지에 대해 차분하고도 진지하게 묻고 답한다. 물론 이 물음과 답은 직설적이지 않고 이야기 속에 잘 녹아 있는 것들인데, 이 이야기의 성분들은 우리에게 도래할 가까운 미래의 꿈을 미리 연습하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당선자의 앞날에 더 많은 이야기가 찾아와주길 기원한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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