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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기업에 청구서만 날리는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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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제개혁은 뒷전이고 상생 요구만
투자·고용 이행토록 걸림돌 걷어내야

양준영 산업부 차장



[ 양준영 기자 ] 지난달 재계 5위 롯데그룹이 ‘투자 대열’에 합류하면서 10대 그룹의 중장기 투자·고용계획 발표가 마무리됐다. 구조조정 중인 현대중공업을 제외한 10대 그룹의 향후 3~5년간 투자액은 400조원을 넘고, 채용 인원도 30만 명에 달한다. 지난해 말 LG그룹을 시작으로 김동연 경제부총리의 현장 방문에 맞춰 기업들은 약속이나 한 듯 ‘통 큰’ 투자·고용계획을 내놨다. 과거 정부가 그룹 총수들을 불러 간담회를 열고, 전국경제인연합회가 투자계획을 취합해 발표하던 것과 형식은 달랐지만, 내용 면에선 큰 변화가 없다.

최근에는 정부 관료와 기업인들의 만남도 잦아졌다. 투자·고용 절벽이 굳어진 상황에서 기업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재정 투입만으론 일자리를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정부는 고용 주체인 기업에 SOS를 보내고 있다. 그러나 정부 간담회에 참석한 기업인들은 실망감을 숨기지 않는다. 최저임금 인상, 주52시간 근로제 시행 등에 따른 애로사항을 얘기하고 규제 완화를 건의해도 그뿐이다. “경제계의 정책 건의는 메아리조차 없고, 돌아오는 것은 청구서뿐”이라는 불만이다.

국회와 정부는 최근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 등 15개 대기업 임원을 불러 농어촌상생협력기금 출연을 독려했다. 말이 독려지, 사실상 강요나 다름없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지난 정권에서 기업들이 미르·K스포츠재단에 기부금을 냈다가 적폐로 낙인 찍혀 홍역을 치른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이를 의식한 듯 “정권이 바뀌어도 재판정에 세우지 않겠다”는 발언까지 나왔다고 한다. 한 기업 임원은 “아쉬울 때 대기업에 손을 벌리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고 꼬집었다.

대기업의 이익을 중소기업과 나누라는 협력이익공유제 역시 정부의 기업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대기업이 혁신을 통한 원가 절감과 생산성 향상보다는 중소기업을 착취해 이익을 높인다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자유시장경제의 근간을 흔들고, 기업의 투자 의욕을 꺾을 수 있다는 제도 자체의 문제점 외에 추진하는 방식도 잘못됐다. 정부는 도입 여부를 강제가 아니라 자율에 맡기고, 참여 기업에 인센티브를 주는 방식이라고 강조한다.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도입하면, 내용상 흠이 있어도 괜찮다는 식이다. 무책임한 처사다. 기업이 정부 방침을 거스르기도 쉽지 않다. 도입하지 않은 기업은 도입한 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는 것 아닌가.

연말이 코앞에 다가왔지만 내년 사업계획을 짜지 못한 기업이 많다. 대외 경영 여건이 갈수록 악화하고 있어서다. 자동차, 조선산업은 일찌감치 빨간불이 켜졌고, 마지막 버팀목인 반도체도 D램 가격 하락에 중국의 견제까지 더해져 내년을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힘들지 않았던 적이 별로 없지만, 올해는 유난히 더 힘들다”고 기업인들은 토로한다. 정부는 간담회를 열어 기업들의 어려움을 듣는 것에 그쳐선 안 된다. 규제 혁파와 노동시장 구조 개혁에 대한 접근방식에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보여주기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기업 투자를 가로막는 걸림돌을 걷어내는 게 정부가 지금 해야 할 일이다. 기업들이 약속한 투자·고용계획을 차질없이 이행할 수 있도록 말이다.

tetriu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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