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3·1운동 100주년…항일투쟁 자취를 찾아서 <下> 중국 북간도
'간도대통령' 김약연 선생
유학자였으나 기독교 수용해
교육·독립운동의 토대 삼아
학교 옛터엔 기념관·기념비 뿐
중국으로 포장된 '윤동주 생가'
평생 한글로만 詩를 썼는데
'중국 조선족 시인' 표지석
관광테마공원처럼 꾸며 씁쓸
[ 서화동 기자 ]
서울에서 시작된 3·1만세운동의 불길은 시차를 두고 전국 각지는 물론 국외로도 번졌다. 두만강 건너 북간도 룽징(龍井·중국 지린성)의 드넓은 들판인 서전대야(瑞甸大野)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 퍼진 건 1919년 3월13일. ‘조선독립선언서 발표 축하회’에 모여든 3만여 명이 들판을 가득 메웠다. 독립선언서 낭독이 끝나자 “대한독립 만세!” 소리가 천지를 울렸다.
행사가 끝난 후 룽징의 일본영사관으로 향하던 만세 시위대 중 17명이 일본 무장경찰 발포로 순국하고 30여 명이 다쳤다. 이에 분노한 동포들은 그해 5월 말까지 만주 전역에서 50차례 이상 만세 시위를 벌였다. 또한 무장 투쟁론이 확산하면서 이듬해 봉오동 및 청산리전투의 대승으로 이어졌다. 이 같은 북간도 독립운동의 중심은 명동촌과 명동학교였다.
옌지(延吉)에서 룽징을 지나 북·중 접경 지역인 두만강변 싼허(三合) 방향으로 20㎞쯤 가다 보면 명동촌이 있다. ‘명동’ ‘윤동주 생가’라고 크게 새긴 표지석을 지나 마을로 내려가다 맨 처음 만나는 게 윤동주 시인의 생가다. 높다란 담장을 두르고 ‘중국 조선족 시인 윤동주 생가’라고 한글과 한자로 새겨 놓은 모양이 왠지 낯설다. 평생 한글로만 시를 쓴 윤동주가 ‘중국 시인’이라니….
오랜 세월 허름한 시골에 불과했던 명동촌은 깔끔하게 단장한 관광지로 변모했다. 윤동주 생가 구역에 들어서자 크고 작은 시비들이 즐비하다. 윤동주의 반신상을 부조하고 ‘서시(序詩)’를 한글과 한자로 새겨 놓은 시비는 사람 키보다 크다. 조경도 공원처럼 깔끔하게 정비해 놓았다.
시비를 지나 생가로 가는 길목 오른편에 허름한 비각(碑閣)이 눈에 띈다. 비석에 한자로 새겨진 글자는 ‘김약연 목사 기념비’. 비석 윗부분이 깨져 ‘金’자는 온전치 않다. 비석 가장자리도 상처 투성이다. 1944년 세워진 기념비는 중국 공산화와 문화혁명을 거치며 마을 앞 개울의 징검다리로 사용되고, 밭에 묻히는 등 수난을 겪다가 1980년대에 와서야 복원됐다고 한다.
특이한 건 비석을 받치고 있는 책 모양의 조형물. 성경이다. ‘간도 대통령’으로 불린 김약연 선생(1868~1942)은 1899년 함경북도 종성·회령에서 김하규, 문병규, 남종구 등 다른 유학자 네 명과 함께 두만강을 넘어와 명동촌을 일궜다. 이듬해엔 윤하현이 가솔을 이끌고 합류했다. 김약연은 윤동주의 외숙, 문병규는 문익환 목사의 조부, 윤하현은 윤동주의 조부다. 다섯 집안의 일가 160여 명은 불과 5~6년 만에 약 20㎢의 토지를 개간했고 10여 개 마을이 잇따라 형성됐다.
이상설이 북간도에 세운 첫 학교인 서전서숙이 그가 헤이그 특사로 떠난 뒤 문을 닫자 김약연은 1908년 명동학교를 열었다. 특히 신민회 회원인 정재면을 통해 받아들인 기독교 신앙은 명동촌과 명동학교 발전의 원동력이 됐다.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신앙과 삶, 교육, 독립운동이 한몸으로 움직였던 것. 김약연은 명동교회를 세웠고, 1929년에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명동교회 목사로 부임했다. 훗날 사회주의자가 된 이동휘도 전도사로 활약했다.
1929년 인민학교로 넘어가기 전까지 명동학교는 1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윤동주와 송몽규, 나운규와 문익환 목사가 이 학교 출신이다. 명동촌에서 서기를 지낸 송길연 씨(63)는 “명동학교 졸업생의 99%는 독립운동에 투신했고 3·13만세운동에 앞장선 것도 명동학교 학생들”이라고 설명했다.
평일이라 그런지 윤동주 생가는 찾는 이가 별로 없이 고즈넉하다. 10칸짜리 기와집인데 부엌과 아궁이가 실내에 있는 구조다. 어린 윤동주와 송몽규, 문익환이 여기서 크고 어울렸겠구나 싶어 감회가 새롭다. 윤동주 생가에서 명동학교로 가는 길목에는 송몽규의 옛집도 깔끔하게 단장돼 있다. 하지만 커다란 철문이 굳게 잠겨 있어 들어갈 수 없었다.
명동학교 옛터에는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명동학교의 역사와 김약연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생애와 사진, 친필 원고, 주요 사건과 관련 사진, 당시 공부했던 교과서 등을 전시해 놓았다. 교실 하나에는 한복 차림으로 공부하고 있는 윤동주 모습을 재현해 당시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지금의 명동촌은 말끔하게 단장돼 있지만 느낌이 씁쓸하다. ‘중국조선족 교육 제1촌(村)’이라는 명동학교 입구의 현판이 말해주듯 모든 것이 ‘중국’이라는 외피로 덮여 있어서다. 기념관 바로 옆에 김약연 흉상이 서 있다. 짧은 머리에 팔(八)자 수염을 기른 선생의 꼿꼿한 모습을 대하니 그의 유언이 떠오른다.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
룽징=서화동 문화선임기자 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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