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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칼럼] 노동조합은 더 이상 약자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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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에 기여한 노동세력
국가 정책까지 좌우할 정도 됐지만
지금도 사회적 약자로서
국민 성원 받는다고 여기면 착각

눈앞의 이익 위해 생떼 쓰는 대신
우리의 미래 위해 힘 모아야"

황영기 < 법무법인 세종 고문, 前 금융투자협회장 >



1970년 11월 청계천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영세 의류제조회사 재단사이던 스물두 살 청년이 분신자살을 한다. 이름은 전태일.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로조건을 개선해 달라는 간절한 요구가 무시당하자 분신 항거를 선택한 것이다. 당시 구로동의 ‘벌집’에는 동생 학비를 벌기 위해 스물도 안 된 나이에 고향을 등진 어린 처녀들이 밤마다 눈물을 훔치고, 힘 좀 써야 하는 생산현장에는 여드름투성이 총각들이 ‘공돌이’ 소리를 들어가며 기름밥으로 끼니를 때우던 시절이었다.

그때 우리는 노동자들을 사랑하고 가슴 아파했다. 대학진학률이 27%인 때라서, 대부분의 젊은이는 학업의 꿈을 접고 하루 열 몇 시간을 일해야 하는 생산현장에 뛰어들었다. 그들은 우리의 아들딸이고 친구이고 동생이었다. 아버지 전 재산인 논 팔고 소 팔아 대학에 들어온 ‘선택받은’ 젊은이들은 아마도 부채의식에 공장으로, 농촌으로 야학 활동에 나서 어린 후배들의 공부에 대한 한을 풀어주기도 했다. 당시 우리 사회를 지배하던 군사독재세력은 이런 활동을 반체제운동의 수단으로 보고 탄압의 채찍을 휘둘러댔다.

탄압은 저항을 낳는 법. 학생들과 시민운동가들이 조직화되기 시작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노동자들의 소박한 갈구가 결국 반독재 민주화 투쟁으로 이어진 것은 역사의 필연이었을 것이다. 1987년의 6월 항쟁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을 뿐 아니라 노동운동에서도 극적인 분기점을 만들어 냈다. 6·29 선언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인 7월5일, 울산의 현대엔진에서 현대그룹 최초의 노동조합이 결성되면서 소위 ‘노동자 대투쟁’의 서막이 올랐다. 오랜 기간 가부장적 서슬에 눌려 살았던 노동자들의 분노가 폭발하기 시작하자 그 기세는 걷잡을 수 없이 불타올라 그해 여름 대한민국은 사상 유례없는 규모와 강도의 노동자 시위를 목도하게 된다.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이 뭉치면 노동자의 처우 개선 정도가 아니라 나라까지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정치권 또한 단결된 노동자들의 엄청난 투쟁력에 놀라 수많은 친노동적인 입법과 행정조치를 쏟아냄으로써 노동운동의 법적 기반을 다져 줬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한국 사회에서 노동조합은 약자가 아니라 강력한 힘을 가진 집단으로 우뚝 서게 된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노동조합의 영향력은 국가 정책 수립에도 깊숙이 미치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주 52시간 근로제도나 최저임금제 같은 친노동정책을 거침없이 밀어붙이는 데는 노동계의 강력한 요구가 있기 때문이다. 낯 모르는 소상공인과 자영업자들의 죽겠다는 아우성보다는 정권 창출의 일등공신인 노조의 주장이 더 무섭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은 짧은 시간에 먼 길을 달려왔다. 전태일 열사가 불붙인 작은 불씨가 촛불을 넘어 이제는 우리 사회를 이끌고 나가는 강력한 주도세력 중 하나가 됐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노동운동의 지도부가 과거 노동자와 노동조합이 사회적 약자로서 국민들로부터 받았던 관심과 성원을 지금도 받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을 것이다. 덩치가 커지고 힘이 세진 만큼 이제는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절실하게 도움이 필요한 사회적 약자와 국민의 옆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 약자의 무기인 시위와 투쟁을 내려놓고 우리 사회의 균형발전을 위한 정책 수립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일방적으로 생떼를 쓸 나이가 지났다는 말이다. 둘째, 경직된 임금체계가 고용 안정을 해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고 노동자들의 고용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아 유연한 협상에 나서야 한다. 고용 안정은 한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가정의 문제, 사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셋째, 노동자들이 스스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 낼 수 있도록 개개인의 역량 강화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이것은 국가의 과제이기도 하지만, 노동자 입장에서는 미래 생존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피엔스》의 저자로 잘 알려진 유발 하라리는 그의 최근 저서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간의 일이 없어지는 가까운 미래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고 있다. 격변의 시대에 내던져진 노동자들을 위해 과연 대한민국의 노조는 제 할 일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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