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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번 실패도 용인하지 않는 구시대적 징벌부터 없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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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54주년 - 혁신성장, 성공의 조건
(3) 실패를 과감히 지원하라

혁신 막는 '실패 징벌' 네 가지
● '복지부동' 키우는 감사원 정책감사
● 특허로 성패 가르는 R&D 평가
● 판단기준 모호한 배임죄 기소
● '무한책임주의' 창업 연대보증



[ 백승현 기자 ]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격언이 있다. 혁신성장에도 정확히 들어맞는 말이다. “혁신성장이야말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하나의 성공사례가 나오고, 그것이 또 다른 실패를 거듭하면서 제2, 제3의 성공사례로 진화하기 때문이다.”(이민화 KAIST 교수·전 벤처기업협회장)

하지만 한국에서는 유독 실패가 용인되지 않는 문화가 오랫동안 자리잡아왔다. 여기에는 도전보다 안정 성향의 문화가 영향을 미쳤지만 무엇보다 격려보다는 책임을 씌우는 정책적인 관행, 모험적 시도를 깎아내리는 비즈니스 관행이 근본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전문가들은 혁신성장이 성공하려면 △공무원의 정책 의지를 꺾는 감사원의 정책감사 △안정적·추격형 연구에 집착하는 연구개발(R&D) 평가제도 △기업가정신을 갉아먹는 광범위한 배임죄 적용 △재창업을 막는 무한책임 연대보증 관행 등 네 가지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무원 정책 혁신 꺾는 감사원 정책감사

“민간에서 제안해온 아이디어가 정말 좋아도 쉽게 정책으로 입안하기 힘듭니다. 정책의 긍정적 효과가 99%여도 나머지 1%만 부정적 효과가 있으면 나중에 감사원 감사에서 문제가 될 수 있거든요.” 한 경제부처 A국장이 들려준 경험담이다. 아무리 좋은 정책도 결과적으로 약간의 부작용이 발생하면 감사원에서 과도한 책임을 묻다 보니 몸을 사릴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역대 정부에서 대통령이 규제 완화를 그토록 외쳐도 공무원들이 규제 완화에 소극적인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감사원 정책감사에 있다. 정부도 이를 모르지 않아, 지난 정부 때는 대통령이 감사원의 소극적 행정을 질타하며 ‘공무원 면책제도’를 강화하라고 지시까지 했다. 공무원이 규제개혁을 위해 적극 행정에 나선 경우 예상치 못한 부작용이 발생해도 면책하자는 제도다. 당시 정부는 면책조항을 관련법에 넣기로 했지만 감사원은 일선 부처에 영(令)이 서지 않는다는 이유로 누락했고, 경제부총리가 이 문제를 거론하며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이민화 교수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입맛대로 감사가 이뤄지니 어떤 공무원이 혁신적인 일을 할 수 있겠느냐”며 “공무원의 복지부동은 민간에 정책으로 그대로 파급된다는 점에서 비전문기관인 감사원의 정책감사야말로 혁신을 가로막는 악의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특허만 내면 OK’ R&D 평가제도

국내 과학기술 분야 정부출연연구기관에서 매년 쏟아내는 특허 출원 건수는 최근 5년간 3만6000건에 달했다. 하루 1000건이 넘는 특허 기술이 나오는 셈이다. 하지만 특허가 실용화돼 산업으로 이어지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 대부분 특허출원 자체로 끝나는 일이 많다는 얘기다.

출연연 연구자들이 특허 출원 자체에 집착하고 국내 특허출원에 집중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정부 예산을 받아 과제를 수행하는 데 성공이냐 실패냐를 가르는 평가 기준이 특허출원 여부기 때문이다. 정부의 R&D 평가제도 역시 마찬가지다. 국책연구기관의 한 관계자는 “당장의 성과를 낼 수 있는 연구과제 위주로 평가가 이뤄지다 보니 혁신적·선도형 연구과제는 뒷전으로 밀리기 일쑤”라고 했다.

이우영 한국기술교육대 교수는 “유럽 대학에는 ‘실패학’이라고 해서 실패한 사례를 연구해 성공의 씨앗으로 삼는 과목도 있다”며 “연구자의 비위가 없는 한 실패한 연구과제에는 한 번 더 도전할 기회를 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이현령비현령’ 배임죄 언제까지

기업의 혁신을 가로막는 대표적인 ‘실패 징벌’로 꼽히는 것은 ‘배임죄’다. 배임죄를 놓고 논란이 계속되는 이유는 명확한 기준 없이 판사 성향과 시대 환경에 따라 죄가 되기도, 안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형법은 ‘타인의 사무’를 처리하는 자가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로 재산상 이익을 취하거나 제3자에게 이익을 취하도록 함으로써 타인에게 손해를 끼친 경우 배임죄로 처벌하도록 하고 있다. 문제는 타인의 사무와 임무에 위배하는 행위의 판단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 종종 ‘경영상 판단’이라는 주장과 배치된다는 것이다.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 귀에 걸면 귀고리, 코에 걸면 코걸이)’이라는 비판이 지속되면서 법원의 무죄 선고율도 높아지는 추세다. 소진 법무법인 광장 형사팀 변호사는 “기업의 투자행위가 경영상 판단인지 배임인지에 대한 객관적 기준이 없어 판단하기 어렵다”며 “기존 판례도 ‘종합적 판단’을 통한 사후 판결이기 때문에 기업으로서는 투자 단계에서부터 검토해야 할 법적 리스크가 많다”고 지적했다.

◆재창업 막는 무한책임 연대보증 관행

정부는 4월 정책자금 대출의 연대보증을 폐지했다. 2010년부터 단계적으로 폐지해 앞으로는 중소기업진흥공단 등에서 자금을 조달할 때 연대보증 조건을 달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기존 기업인들은 여전히 연대보증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족쇄’에 시달리고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지난해 연대보증 등으로 폐업기업 대표자가 떠안은 부담금은 평균 3억5600만원에 달했다. 연대보증 채무로 인해 재창업이 어려운 것은 물론이고 신용불량자로 전락해 정상적인 생활도 쉽지 않다.

청년창업 지원 시스템도 부족하다.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기술이 있어도 벤처창업을 하려고 하면 자금을 융통할 수 있는 창업기술 평가 체계나 자금조달 시스템이 부족해 창업자금을 조달하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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