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 BIZ School
Let"s Study 디자인 싱킹 (2)
올해 4월,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는 싱가포르가 선진국으로 빠르게 성장한 배경에 ‘디자인 싱킹’이 있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당시에는 디자인 싱킹이라는 용어조차 존재하지 않았지만, 문제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도출한 뒤 빠르게 구현해 보고 테스트하는 과정이 디자인 싱킹과 다름없다는 것이다. ‘구글트렌드’에 따르면 최근 디자인 싱킹을 가장 많이 검색한 나라는 싱가포르다. 작은 도시 국가 싱가포르는 어떻게 디자인 싱킹에 주목하게 됐을까.
디자인 싱킹이란 문제 영역을 실제 그 문제에 영향을 받는 사람의 입장이 돼 조사하고, 해결 지향적 사고를 바탕으로 도출된 아이디어를 빠르게 실험해보며 해결안을 고안하는 방법을 일컫는다. 2000년대 들어 세계적인 디자인 자문기업 IDEO와 미국 스탠퍼드대 디스쿨(d.school)에서 디자인 싱킹을 정형화된 프로세스 및 도구로 소개하면서 다양한 분야에 차용돼 왔다. 사실 몇 단계의 정형화된 방법론으로 디자인의 핵심 역량을 전달하기에는 한계가 있지만, 이들이 정리한 소위 디자인 싱킹 프로세스는 디자인 전문성이 없던 분야에서도 디자인적 접근법을 활용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최근 가장 널리 알려져 있는 디자인 싱킹 프로세스는 ‘수요자를 조사해 공감하기(empathize)’ - ‘문제의 근본 원인 정의하기(define)’ - ‘아이디어 도출하기(ideate)’ - ‘프로토타입 만들기(prototype)’ - ‘테스트하기(test)’ 다섯 단계로 구성돼 있다. 이 과정은 선형적으로 진행되고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혁신적이고 실현 가능한 해결안을 만들 때까지 몇 차례나 반복된다는 데 정수가 있다. 기존의 공학 기반 방법에서 문제 정의가 전문가나 개발자 시점에서 이뤄졌다면, 디자인 싱킹에서는 그 문제와 연관된 다양한 이해 관계자를 참여시키고 그들의 시점에서 문제의 근본 원인을 파악해 나간다. 이를 위해 인터뷰, 현장 관찰, 코-크리에이션 워크숍 등 정성적, 공감적, 협력적 도구가 활용된다.
싱가포르 정부 차원에서 지원
기존 보유 자원이 부족하고 제조업 규모가 작기 때문에 고부가가치 서비스산업을 육성하고 세계적인 흐름에 빠르게 대처해야 하는 싱가포르가 디자인 싱킹을 혁신 도구로서 주목한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선진국의 성공적인 정책을 벤치마킹하고 자국의 환경에 맞게 변형해 적용하는 데 경험이 많은 싱가포르는 2000년대 초반 미국과 유럽에서 디자인 싱킹이 확산되는 것을 보고 정부와 기업 관리자들을 스탠퍼드대 디스쿨에 파견하거나, 해외 유수의 디자인 자문기업을 초청해 디자인 싱킹을 적극 교육했다.
디자인 싱킹을 활용해 고객 경험을 개선한 대표적인 사례로는 싱가포르 창이공항을 들 수 있다. 스카이트랙스가 매년 시행하는 세계 공항 평가에서 최근 5년 연속 1위를 차지한 창이공항은 이용자들에게 만족스러운 경험과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디자인 싱킹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iChangi라는 공항 서비스 앱(응용프로그램)은 사용자 인터뷰와 현장 관찰을 통해 비즈니스 목적의 외국 여행객, 관광 목적의 현지인, 쇼핑과 외식을 목적으로 한 방문객을 주요 고객 대상으로 선정, 수차례의 프로토타입과 테스트를 거쳐 개발했다. 작년 10월에 문을 연 제4 터미널은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미래적인 공항의 모습을 선보였는데, 디자인 싱킹은 존재하지 않는 미래의 모습을 고객 중심적으로 설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싱가포르 하면 떠올리는 산업 중 하나인 금융업에서도 디자인 싱킹을 활용한 예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싱가포르의 대표 은행 중 하나인 OCBC(Oversea-Chinese Banking Corporation)는 2010년 고객 경험 부서를 최고경영자(CEO) 직속으로 신설하고 디자이너를 부서 최고 경영자로 앉혔다. 디자인팀이 주력한 것은 일반인은 이해하기 어려운 금융 전문 용어를 비롯해 전반적인 은행 서비스 가입 및 이용 절차를 고객의 관점에서 간결, 명쾌, 친근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결과 OCBC의 고객 만족 지표는 3년 사이 금융계 1위로 뛰어올랐다. 디자인 싱킹을 통해 탄생한 투자 및 보험 상품은 8배 수익을 올리는 성과를 달성했다.
2011년 OCBC는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초반 출생)를 타깃으로 ‘프랭크(Frank)’란 금융 상품을 출시했다. 상품 기획 및 개발, 마케팅 전반에 디자인 싱킹이 활용됐다. 막 대학을 졸업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시작한 밀레니얼 세대는 은행의 새로운 고객층이다. 자기 실현 및 표현의 욕구가 강하고, 트렌드에 민감한 젊은 고객층에 기존 은행 상품은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OCBC 고객 경험 디자인 팀은 젊은 고객층이 시간을 많이 보내는 대학 캠퍼스, 쇼핑몰, 나이트클럽까지 함께하면서 그들만의 소비 심리를 이해하고자 했다. 디자인 팀은 아이디에이션 단계에서도 미래 고객뿐만 아니라 은행의 다른 부서 직원들까지 참여시켜 함께 아이디어를 고안하고 토론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빚어진 아이디어들은 프로토타입으로 구현해보고, 고객 경험 및 실현 가능성을 테스트했다. 그 결과 OCBC는 혁신적이고 젊은 감각의 상품 ‘프랭크’를 출시했다.
OCBC은행 젊은 고객 빠르게 흡수
고객들이 보통 예금 적금 등의 다양한 목적을 위해 여러 계좌를 보유하고 있는데, 프랭크는 젊은 세대들이 장단기 목표를 정하고 저축할 수 있도록 한 계좌 안에 여러 ‘저금통(saving jars)’을 만들 수 있는 기능을 도입했다. 예를 들어 하나의 프랭크 계좌 안에 ‘5개월 후 부모님 선물을 위한 저축’, ‘2년 후 세계 여행을 위한 저축’, ‘5년 후 결혼 준비를 위한 저축’ 같은 명목의 다양한 저금통을 만드는 것이다. 새로 은행 계좌를 개설하고 카드를 발급받는 과정에서도 쇼핑하는 것 같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100가지가 넘는 카드 디자인을 만들어 고를 수 있도록 했다. 오프라인에서도 고객에게 독특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주요 대학과 쇼핑몰에 ‘프랭크 스토어’를 설치, 은행 업무가 있을 때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지나가다 카드 디자인을 구경하고 다양한 서비스 콘텐츠를 경험할 수 있는 장소로 디자인했다. 프랭크 출시 후 OCBC는 밀레니얼 세대 고객 점유율을 70% 이상 끌어올릴 수 있었고, 해당 시장의 선두 주자로 자리매김했다.
싱가포르의 다양한 산업에서 디자인 싱킹이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새로운 방법을 발 빠르게 도입해 추진한 경영진의 혁신적 마인드셋과 조직적 민첩성이 있었다.
이정주 < 싱가포르국립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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